[언론 다시보기]'아흔아홉 가지 이유'와 '한 가지 이유'
방현석 소설가 | 입력
2003.07.09 00:00:00
‘파업이 나라경제를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시민을 볼모로 한 파업은 안된다.’
화물연대의 파업을 기점으로 날마다 이런 주장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보도의 형태이든 논평의 형태이든 결론은 파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제사정이 나을 때는 경제발전의 호기에 재를 뿌려서는 안되고, 경제사정이 나쁠 때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더욱 멍들게 해서 안되기 때문이다. 파업을 해서 안되는 이유의 압권은 2001년 6월에 있었던 ‘가뭄파업 불가론’이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에 돌입하자 당시 재계와 영향력이 큰 언론들은 일제히 이 가뭄에 웬 파업이냐고 핏대를 세웠다.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농민들의 고통을 파업을 해서 안되는 이유로 끌어다 댈 만큼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파업이 ‘안되는 이유’가 아흔아홉 가지나 된다.
그러나 그들이 열거하는 아흔아홉 가지 근거들이 내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그들이 참으로 무지하거나 완벽하게 뻔뻔스럽다는 사실뿐이다. 너무나 상식적이게도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가 자신의 존엄과 권익을 방어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체제가 부여한 최후적 수단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유지해야 할 존엄과 권익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며 ‘자본’이 파업의 권리를 허용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파업은 파업불가론자들이 선동하는 것처럼 반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체제 내에 붙들어두기 위한 혁명 예방의 수단이며, 혁명을 회피하려는 자본과 노동간의 고도화된 협력수단이다.
혁명적 관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필요하고 정당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지 않으면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기 불가능하거나 ‘권익’의 중대한 손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닌가?
지금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곤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이 실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파견노동자의 규모가 8만80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도급, 사내하청 등의 형태로 위장한 불법 파견의 규모는 30만명을 상회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산이다. 동일한 공장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과거의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그들은 경제적인 고통은 물론 기존의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뼈아픈 상처를 입고 있다. 아직 정규직을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비정규직화된 노동자들의 나락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더욱 필사적인 자기 방어에 나서고 있다.
이것이 부당하다고 하는 파업불가론자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살아가라는 것인가. 아니면 혁명을 하라는 것인가. 파업불가론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논리다.
파업 아닌 다른 방법? 파업 아닌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파업의 필수조건은 협상 가능성의 부재다. 파업에까지 이른 경우를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상대의 협상 기피와 합의 파기다. 상대가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협상에 응하지 않을 때, 위기에 빠진 노동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합의를 깨고, 협상에 불응하는 자본의 쟁의행위는 일년 내내 지속되는 것인 반면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는 참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벌이는 고작 며칠간의 파업기간 뿐이다. 노동자들로부터 악법으로 지탄받는 ‘파견법’마저 위배하며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는 자본의 불법 쟁의행위에 대해 엄단한 적이 있는가. 언론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