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국과수가 도장 감정을 잘못해 50대 사업가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보도 이후, 대구MBC를 찾아오겠다는 국과수 관계자의 전화에 보도국에는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밤새 뒤척인 박재형(대구MBC 기자)은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나왔다. 바람이 찬 2월 중순의 대구 시내는 생기 없는 그의 표정처럼 잿빛이었다. 이른 아침 보도국은 한산했다. 서로 통했던지, 이동삼(카메라 기자)도 그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작전(?)을 세웠다. 보도에 반영하지 않더라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들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살짝 촬영하고, 와이어리스(무선마이크)로 녹음을 하기로 했다. 와이어리스는 회의실 탁자 밑에 붙여놓았다.
국과수 직원들이 동대구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박재형은 와이어리스가 께름칙했다. “형! 빨리 와봐요.” 이동삼을 급히 불렀다. “국과수 사람들인데 와이어리스 있는 곳을 알아보지 않을까요.”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요.” 박재형은 회의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책장을 가리켜 말했다. “책 사이에 끼워 놓읍시다.” “오디오가 깨끗하지 않을 거야.” “수첩에 적으면 돼요.” 박재형은 탁자 밑에 붙여놓은 와이어리스를 떼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사이에 안 보이게 놓았다.
국과수 사람들이 보도국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3명이었는데, 그중 1명은 정복 경찰관이었다. 우람한 덩치의 정복 경찰관과 달리 다른 2명은 사복 차림이었다. 작은 체구에 깐깐해 보이는 문서영상과장은 자신을 양후열이라고 소개했다. 박재형은 양후열 일행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양후열은 앉자마자 대뜸 말했다. “이곳에 녹음 시설은 따로 없죠? 방송국이라 혹시 그런가 싶어서요. 테이블 아래에 녹음 장치가 있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러자 정복 경찰관이 의자를 뒤로 빼더니 큰 손으로 테이블 아래쪽을 더듬어 훑었다. 그 순간 박재형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얼어붙어선 안 된다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감정 실수 인정에 “잘못 들었나?” 의심
명함을 주고받는 동안 박재형은 회의실에 감도는 어떤 중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2~3분 침묵이 이어지다 문서영상과장이 입을 열었다. 보도를 잘 봤다는 둥, 사전에 얘기하고 보도를 하면 더 좋았을 거라는 둥 뜸을 들이다가 목을 가다듬더니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보도 이후 문제의 수표에 찍힌 2개 도장을 재감정한 결과 도장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고, 도장이 날인된 상태가 변화무쌍해 최초 감정에서 감정사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순모씨 보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우리가 실수한 겁니다.” 박재형은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아, 이 말을 하러 대구까지 왔구나.’ 국과수의 방문 목적은 보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감정 실수를 자인하는 것이었다. 박재형의 가슴에 매달린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불면의 밤을 만든 그 지독한 불안이 진눈깨비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국과수 과장은 감정 실수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다만 또 다른 국과수 감정 오류와 관련한 대구MBC 보도는 팩트가 다르다며 정정을 요구했다. 박재형은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국과수 직원들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 내내 하소연과 약간의 원망, 다짐이 뒤섞였다. 국과수 과장은 가방에서 A4 용지 대여섯 장 분량의 서류를 꺼내 박재형에게 전했다. 맨 앞장에 적힌 ‘국과수 감정의 신뢰성 제고 방안’이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박재형이 서류를 슬쩍슬쩍 넘겨보니 문서 감정 시스템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등이 적혀 있었다.
국과수 직원들이 돌아가고 보도국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보도국장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저녁에 나갈 뉴스 아이템을 전면 수정했다. 박재형은 ‘국과수 감정 오류 공식 인정’을, 사건팀 기자 도성진은 ‘국과수 문서 감정 시스템 일대 개선’ 리포트를 맡았다. 박재형은 권순모에게 전화해 국과수가 도장 감정 잘못을 시인했다고 전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국과수의 잘못된 도장 감정으로 한 달 넘게 구치소 생활을 한 권순모는 이제야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다면서 “다른 무고한 시민들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심경을 밝혔다. 대구MBC는 2월26일 저녁 뉴스데스크를 통해 ‘국과수, 감정 실수 인정’ 등 2개 리포트를 집중 보도했다.
◇문서감정실 현장 취재 설득 또 설득
3월이 되어서도 후속 보도는 이어졌다. 국과수의 문서 감정을 맹신하는 사법부의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국회 차원의 대책 마련 움직임 등을 보도했다. 그렇게 국과수 관련 보도가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문서영상과장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국과수가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지만 장비와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박재형은 국과수 문서감정실 취재를 추진했다. 그는 양후열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 양 과장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했으면 됐잖아요? 저도, 직원들도 모두 힘듭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며칠 뒤 박재형은 다시 전화했다. “국과수의 열악한 환경을 외부에 알려 장비와 인원 보충 등이 되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국민 한 명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국과수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아 시스템을 정비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국과수 취재를 요청한 것은 2가지 이유였다. 이번 기회를 살려 국과수 내부 시스템을 보고 싶은 마음, 다른 하나는 국과수 후속 대책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계속된 전화에 면역력이 생겼는지, 양 과장의 어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한 번만 더 설득하면 취재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중순 박재형은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국과수로 향했다. 취재 내내 조언을 마다하지 않은 이동삼도 함께였다. 두 기자는 정희선 소장을 만나 40분가량 대담을 나눴다. 국과수 최초 여성 수장인 정희선은 문서 감정 분야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였다. 유전자 감식과 달리 필적과 도장 등 문서 감정 분야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뒤이어 찾은 문서감정실은 예상보다 열악했다. 감정인 4명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수천 건의 감정물을 밤을 새워가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찰과 검찰, 재판부가 국과수의 문서 감정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는 상황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보였다. 문서감정실장은 한 감정 건에 대해 두 명의 감정인이 교차 감정을 하고, 실제 증거물을 두고 감정인들이 감정 협의를 하는 등 시스템을 손질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문서감정실의 현실을 직접 확인한 박재형은 관련 내용을 담은 리포트에 인력과 장비의 대폭 보강, 처우 개선 등 국가 차원의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썼다.
◇재심 무죄 판결에 뜨거워진 눈시울
국과수 문서감정실 취재가 있은 지 석 달 후, 권순모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심 재판 판결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재판이 길었는데 드디어 선고가 나오네요.”
“내일 봐야겠지만, 저는 무죄를 확신합니다.”
“진실은 두 개일 수 없으니까요.”
권순모는 국과수 감정 오류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박재형은 다른 취재 활동을 하면서도 심리가 있는 날마다 시간을 내 재판을 방청했다. 선고 공판이 열린 2009년 6월18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박재형은 대구지법 별관2호 법정에 앉아 선고를 들었다. 대구지법 형사11단독 판사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판사는 권순모가 최초 재판에서 구속됐지만 이후 수표를 실제 위조한 당사자가 유죄판결을 받은 데다, 사건의 유력한 증거인 국과수의 문서 감정 오류가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 순간 권순모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박재형은 보았다. 무고죄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은 지 17개월 만에 권순모는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됐다. 법정 밖으로 나온 그에게 무죄 판결의 소회를 들었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되겠습니까? 두 번 다시 저 같은 사람이 억울하게 교도소 가서는 안되고, 사업이 패가망신해도 안 됩니다.”
그해 12월10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제12회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시상식이 열렸다. 국과수 감정 오류 보도로 상을 받은 박재형은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인권과 관련해서 이렇게 권위 있는 상을 대구 경북 지역에서 최초 수상해서 가슴이 벅차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렇게 운을 띄우며 소감을 이어가는데, 식장 한쪽에 꽃다발을 들고 있는 권순모가 서 있었다. 수상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고 아침 일찍 대구에서 올라온 모양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