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다시보기] 하롱베이에서 만난 한국노동자
방현석 소설가 | 입력
2003.08.20 11:12:20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이 모임에 이름을 얹어두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부터 베트남을 드나들며 약간의 공부를 한 것을 빌미로 가끔 베트남 전문가 비슷한 행세를 하기도 한다. 가당치 않게도 베트남의 사회, 역사, 현실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고 토론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기행산문집을 내고 난 다음부터는 베트남 여행단의 가이드 노릇까지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베트남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도 굉장히 많아졌다. 베트남 여행길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의 직업들도 참 다양했다. 교사, 교수, 예술가, 변호사, 자영업자, 농민, 학생…. 그렇지만 그 흔한 여행자들 중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직업군이 하나 있었다. 생산직 노동자다. 베트남 현지 공장에 파견된 노동자가 아닌, 순수하게 한국에서 여행을 온 생산직 노동자를 내가 만난 기억은 단 한 번뿐이다.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두 청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현대자동차 노사 합의를 놓고 재계와 일부 언론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베트남에서 만났던 현대자동차의 두 노동자였다. 나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롱베이를 순회하는 뱃전에 그 젊은 노동자들과 나란히 드러누워 함께 탄성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들의 공장생활과 일상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했다.
6박7일 동안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동안 그들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묻고 알려고 했지만, 정작 더 많이 배운 것은 바로 나였다. 약속 시간을 가장 잘 지키는 것도, 베트남 사람들의 친절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베트남의 도로를 절반 가까이 점령한 한국 자동차를 지켜보며 그들이 하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이럴수록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잘 해야 하는데….”
처음 베트남에 온 사람들은 한글로 된 행선지 지명이 그대로 붙은 중고 시내버스를 보며 우쭐해지는 것이 보통인데, 정작 그 자동차를 만든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부심과 동시에 책임을,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현대자동차 노조는 상당히 세련된 전술과 뛰어난 조직력을 동원하여 회사로부터 비교적 많은 것을 얻어냈다. 재계와 일부 언론은 이것이 우리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핏대를 세우며 비판의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많은 임금을 받는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이 자기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이기적인 투쟁을 벌이고, 언감생심 경영권까지 넘보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적 내용이었다. 심지어 이런 ‘부당한’ 요구를 들어준 회사측에까지 비판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과연 그런가. 현대자동차 노사는 비판 받을 만한 잘못이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진정으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일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현대자동차의 노사는 아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하노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브르크에서, 마드리드에서 세계 유수의 메이커들이 만든 자동차들과 나란히 질주하는 현대차를 보았다. 그때마다 든 느낌은 잘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세계 수준의 자동차를 만든 노동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여전히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지닌 도덕적 책무는 그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이번 노사합의 사항에 하청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를 포함시킨 것은 그들이 결코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도덕적으로 해이하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일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그 단초를 보여준 회사측에게도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바로 이것이 세계 표준에 접근해가는 징표다. 세계수준의 안목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했기 때문에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누빈다. 한심한 수준의 재계 인사들과 언론들만이 세계수준에 맞추어 가려는 노사관계를 헐뜯는다. 그들의 안목으로는 결코 세계 수준의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 그들의 저급한 선동이야말로 미래로 가는 나라의 발목을 잡는 매국적 행위다.
다음에는 유럽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현대자동차의 두 청년이 올 여름 파리와 런던을 다녀왔을까. 휴가철이면 배낭을 맨 노동자들이 대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항을 메우는 나라가 되어야한다. 대신 방학과 함께 학비와 여행경비를 스스로 벌려고 일거리를 찾아 달려가는 대학생들이 줄을 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망국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균형잡힌 사회를 만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