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안중근의사 성역화 사업 8년째 실적 없어
김현 기자 | 입력
2001.03.10 13:20:01
세계일보가 안중근 의사가 숨진 여순 감옥 주변의 공동묘지를 성역화 하겠다며 93년 국민들로부터 성금 18억여원을 모아 설립한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사업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세계일보는 92년 10월부터 13개월 동안 대대적인 국민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 모금에는 당시 김대중·김영삼·정주영 대선 후보 뿐 아니라 현승종 총리와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동참했다. 세계일보는 총 4285건의 성금 참여로 모두 18억2888만9559원을 모으면서 이 운동을 사세 확장의 계기로 적극 활용했다.
한 편집국 기자는 당시 모금 운동에 대해 “사운을 걸고 성금 운동을 벌이자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며 “기자들에게도 성금 활동 권유가 있어서 가족 이름으로 여러 번 성금을 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는 이 기금으로 93년 11월 10일 당시 공보처로부터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으며 현재 이 기금은 이자 수입 등으로 30억6045만3395원(1월말 현재)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재단측은 현재까지 가시적인 사업을 내놓은 것이 없는 상태다. <관련기사 3면>
세계일보 본관 3층에 사무실을 차린 재단이 그동안 추진한 사업과 사용한 성금은 여직원 인건비와 2차례의 국제 학술회의 개최, 중국 출장비와 중국 손님 체재비 등이 전부다.
이와 관련 재단 관계자는 오는 26일 안중근 의사가 숨졌던 여순감옥 사형장에 전시실을 꾸미는 등 앞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업에는 1억 원도 채 안되는 비용이 소요될 뿐이어서 이를 본격적인 사업 추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일보가 모금 당시 약속했던 사업의 핵심은 안 의사 유해지 성역화 사업이다.
세계일보는 성금 모금을 시작하면서 사고를 통해 “여순 형무소 인근 야산 6만평을 공원 부지로 매입했다”고 밝혔으나 매입한 사실이 없는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여순형무소 관계자와 부지 매입과 관련 서로 협조하기로 한 정도이며 이마저도 94년 백지화 됐다.
공동 묘지가 조성된 것은 1930년대인데 반해 안 의사가 숨진 것은 이보다 20여 년 앞선 일이기 때문이다. 재단 관계자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박보희 사장 등이 ‘여순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인근 공동 묘지에 매장했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의 성역화 사업에 나섰다”고 밝혔다.
재단측은 안중근 추모사업관계자들로부터 “역사적인 고증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사업에 나섰다”는 비난을 샀다.
안 의사의 유해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재단은 내년부터 유해지 대신 안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은 처음 성금 모금 당시 국민 약속과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단측은 물론 ‘사업 과정을 상세 보도하겠다’고 공언한 세계일보조차 아무런 해명이 없는 상태다.
더구나 고등법원 기념관 계획은 ‘내년부터 시작하겠다’는 막연한 계획만을 갖고 있는 단계인데다 아직 부지 매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앞으로의 사업 계획이 불투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귀언 재단 사무국장은 “여순지역이 특수 군사지역으로 분류돼 있는 데다 중국 정부가 소수 민족의 위인을 숭배하는 것을 꺼려 사업이 쉽지 않다”며 “중국의 관계자들을 접촉하고 제반 여건을 조성하는 데에 지난 8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3년 전 법원 부지 매입이 이뤄지려 했으나 갑자기 외부 사정이 생겨서 중국 정부가 철회한 적도 있었다”며 사업 추진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러나 자체 사업이 아닌 국민 모금으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검토조차 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63년부터 안중근 의사 추모 사업을 해왔던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여순 재단의 국민 모금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숭모회 관계자는 “자금이 늘 부족하지만 세계일보가 성금 모금에 나서면서 변변한 모금 활동도 못해봤다”면서 “당시 법적 투쟁을 해서 여순 재단의 성금을 함께 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사업 자금 대신 정통성을 갖고 있으니 두 단체를 통합하자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며 여순 재단 사업에 대해 “아직 진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안 의사 추모 사업 관계자들은 다들 실패한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밝혔다.
특히 국가유공자의 경우 1개의 기념사업 단체만을 인정하는 관행을 깨고 세계일보가 재단 설립 허가를 받은 것은 일종의 언론사 특혜라는 지적이다. 숭모회 관계자는 “당시 허가 기관이 공보처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국가유공자 추모사업 법인 37곳 중에서 유공자 1명에 대해 2곳의사업단체가 있는 것은 안중근의사 추모사업 뿐이다.
전 세계일보 간부는 “성금은 재단이나 세계일보 돈이 아닌 시민들의 것”이라며 “설립 과정이나 사업 추진, 사후 보도 등에서 모두 실망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