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스타크래프트 세계 챔피언 쌈장 승부조작

몇달전 들은 '사기술'우연히 잡지서 확인, 처음 통화에서 인정하더니 기자회견서 뒤집어 씁쓸

최연진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

프로게임대회에서 승부조작이 횡행한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것은 올 7월이었다.



컴퓨터업계에 희한한 직업을 취재하면서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했던 게임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인터뷰했다.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없는 것은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대뜸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인터뷰기사가 보도됐기 때문에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지나가는 말처럼 게임고수들의 승부조작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당시는 이기석군이 챔피언에 오르기 전이었고 그보다 더 유명했던 다른 챔피언은 군대에 입대한 직후였다. 쉽게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그가 말하는 '사기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채 알아보라는 말만 던지고 일어났다. 며칠 후 세계챔피언이 된 이기석씨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 막연한 이야기에 매달릴 만큼 여유가 없었기에 그 후로 몇 달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들어 컴퓨터잡지를 뒤적이면서 '어뷰즈(abuse)'를 다룬 기사를 봤다. 거기서는 어뷰즈를 두가지로 정의했다. 한 사람이 여러개의 아이디(ID)를 만들어 놓고 특정ID가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자신의 ID끼리 게임을 하는 방법과 서너개의 ID를 개설한 후 게임을 치르며 많은 점수를 얻은 ID가 결선에 오를 수 있도록 '밀어달라', 즉 고의로 져 달라고 부탁을 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두가지 모두 승부조작을 위한 사기였다.



그제야 '사기'가 무엇을 뜻한건지 감이 왔다. 부랴부랴 7월에 인터뷰했던 사람을 찾았지만 이미 퇴사를 한 상태였다. 대신 그를 찾는 과정에서 국내프로게임대회 우승경력이 있고 현재도 활동중인 프로게이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뷰즈라는 행위가 대부분 할 만큼 흔한 일이라며 '쌈장'이야기를 들려줬다. PC통신에 이씨가 어뷰즈행위를 고백한 글과 그 때문에 일어난 논쟁도 볼 수 있었다.



일단 부서에 보고를 한 후 이씨 본인에게 확인하기 위해 한밤중까지 기다렸다. 프로게이머들은 낮과 밤을 거꾸로 살기 때문에 통화를 하려면 기다려야했다.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앉아서 계속 전화를 했지만 이씨 핸드폰은 불통이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일찍 일어나 6시부터 전화를 걸었다. 결국 통화가 된것은아침 8시. 그의 근황을 묻고 '당신이 어뷰즈로 승부를 조작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냐'는 질문을 했다. 이씨는 대뜸 누구에게 들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전 매니저 임모씨 얘기를 꺼냈다. 거기에는 돈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진 구린 사연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이씨는 임씨가 앙심을 품고 기자에게 밀고한 줄 알고 있었다.



이씨는 그 다음부터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어뷰즈를 했다'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듣고 있으면 됐다. 그는 기자에게 두 가지를 강조했다. 자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전 매니저 임모씨가 부추겼다는 점과 승부조작을 행하는 수많은 프로게이머들 가운데 최초로 '용기있게' 양심고백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말한 용기는 나중에 이씨가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게임을 잘 모르는 기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았을 뿐'이라고 말을 바꾸는 '용기'로 돌변했다. 이씨의 주장을 실은 기자회견 기사가 나간 후 다시 만난 프로게이머들은 '게임을 잘 모르는 기자들이 당했다'며 웃었다.



씁쓸했다. 취재하는 동안 내내 아이들 세계에 '설마'할 정도로 어른들 뺨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비단 이씨를 비롯한 나이 어린 친구들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자회견장에 병풍치듯 이씨를 둘러싸고 있던 너댓명의 어른들을 비롯해 그들의 주변에 항상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누구나 다 하니까 괜찮다는 당위성까지 부여해가며 함께 휩쓸리는 아이들을 보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번 보도가 나간 후 정직하게 승부하는 프로게이머들에게는 본의아닌 누를 끼친 듯해서 미안했다. 그나마 한켠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이 있기에 게임산업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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