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핀과 항공모함, 그리고 한국외교
‘린치핀과 항공모함’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지 모른다. 린치핀(linchpin)은 마차나 수레, 자동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이다. 항공모함은 말그대로 바다에 떠 있는 군사비행장이다. 언뜻 소나무와 기차처럼 별 관계없는 단어 조합이다.하지만 이 두 단어는 북한의 4차 핵실험이 벌어지기 전까지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는 키워드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성명에서 “한·미 동맹은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린치핀”이라고 강조했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는 그런 단어가 있다. 따뜻했던 바람, 한낮의 햇살, 말없이 함께하던 발걸음과 그림자… 그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내게 그런 단어는 ‘부암동’이다. 바람과 햇살이 말없이 지나는 언덕과 길목들은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익숙했다. 복작복작한 서울에서 가장 천천히, 그리고 느릿한 풍광을 간직한 동네. 매력적인 공간들이 늘 그러하듯, 낯선 카페와 저택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 부암동에는 느릿한 걸음들이 어울린다. 취재가 일상이 된 하루하루, 많은 것이 그저 익숙해져 용기와 생각들이 빛을 잃어가던
잊힐 권리와 잊히지 않을 각오
최근 강원도가 홈페이지에 도입한 ‘타이머’ 기능이 화제다. 타이머는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의 소멸 시효를 직접 정할 수 있도록 한 기능이다. 강원도의 타이머는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잊힐 권리와 맞물리면서 더 주목을 받았다.잊힐 권리란 무심코 올린 글이나 사진 때문에 생긴 피해를 막기 위해 논의되는 이슈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글에 대해선 당사자가 삭제 요청할 권리를 주자는것이다. 특히 지난 2014년 5월 유럽연합(EU) 최고재판소가 잊힐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하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국내에서도 법 제정 작업을 진행하고
광화문 부대찌개 할머니의 메리 크리스마스
철모르던 유년시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시 직장을 다닌다면 광화문이 아니겠냐고. 80년 즈음, 셈 빠른 엄마따라 강남 전학가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목격하면서도, 역시 서울의 핵심은 광화문이라는 판타지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광화문에서 신문사를 다닌 지 20년이 넘었다. 얼마 전 좋아하는 부대찌개 집을 찾았다가 비보를 들었다. 그 주말부터 장사를 접는다는 소식이었다. 5년전 쯤, 맛집 칼럼을 쓰던 당시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집이었다. 경찰청 뒷골목에 자리잡은 소박한 식당인데, 칠순 할머니가 역시 칠순 즈음 여동생들과
저커버그의 딸을 위한 ‘진짜 선물’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부부는 지난 1일 세상에 통 큰 약속을 했다. 이들 부부가 보유하고 있는 페이스북 주식 중 99%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며칠 전 태어난 딸 맥스를 위한 선물이었다. 시가로 따지면 450억 달러, 무려 52조원에 달하는 액수다. 북한은 물론 리비아, 가나 등 웬만한 아시아·아프리카 빈국의 한해 GDP(국내총생산)를 뛰어넘는 규모다. 통상적인 재단 설립 대신 유한책임회사(LLC)를 만들겠다는 기부 방식엔 논란이 있지만 규모 만큼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커버그는 결정적인 순간…
한·중 FTA ‘상생기금 1조원 오보사태’ 유감
“FTA 1조 기금, 재계 팔 비틀어 동의받았다” “조폭국가…법에도 없는 자릿세를 국가가 뜯는다”….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동의 조건인 농어민 지원을 위한 상생기금 1조원 조성 방안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비판이 거세다. 상생기금이 법에 근거하지 않는 사실상의 준조세라고 공격한다. 위헌성 제기는 물론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색깔공세까지 편다. 또 여야정이 경제계의 의견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고, 국회 비준동의가 임박한 시점에 일방통보해 수용을 강요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 보도가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사법고시 존치가 로스쿨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희망의 사다리’는 2017년 폐지될 사법시험의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슬로건이다. 이미 사법시험을 유지해야 한다는 법안이 국회에 올라 있고, 법제사법위원회 공청회에서는 찬반으로 나뉜 법조인들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 로스쿨 출신 자녀를 둔 국회의원 사회 고위직 인사들의 청탁·특혜 의혹이 불거지면서 사법시험 존치론자들이 내건 문구가 더 부각되고 있다.그러나 수년 간의 논의 끝에 폐지키로 한 사법시험을 되살리는 건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사법시험을 대체할 로스쿨 제도에 맞춰 법조인력 양성제도가 모두 재편되고 있는 상
파리 테러와 시리아 내전 그리고 기후변화
슈퍼 엘니뇨 때문에 지구촌이 포근한 11월을 보내고 있다. 올해가 역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기상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구촌의 정치 안보 기상도는 혹한기를 맞고 있다.사회변동을 분석하는데 있어 자연 요소는 종종 논외로 취급되곤 한다.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파리 테러에 대해서도 다양한 정치적·경제적·종교적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자연의 영향에 대해선 주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이슬람 분파 갈등과 서방의 중동정책, 시리아 내 복잡한 정치상황, 유럽 내 무슬림 공동체…
‘응답하라 1988’과 ‘김연수의 기레빠시’
여고생들의 입에서 그런 원망의 합창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A여고에서 특강을 한 월요일 밤의 일이었다. 심야자율학습까지 반납한 책 좋아하는 여고생과 학교 도서관 선생님의 요청이었다. 책읽기와 글쓰기가 주제였는데,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가 흘렀다. 여러 명을 언급했는데, 함성은 기자와 동갑내기인 소설가 김연수의 단편 ‘뉴욕제과점’에서 터져나왔다. “아, 그놈의 기레빠시!”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는 ‘뉴욕제과점’에는 빵집 아들이었던 소년 김연수의 푸념이 등장한다. 당시 소년들의 판타지였던 빵집
‘거울 나라’의 한국 금융산업
삼성그룹이 지난해 화학·방위 관련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넘긴 데 이어 최근 롯데그룹에 남은 화학부문마저 팔기로 했다. 곧이어 CJ그룹이 케이블TV 1위인 CJ헬로비전을 SK텔레콤에 매각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사업 구조조정을 위한 대기업 간 ‘자율 빅딜’이란 점에서 경제·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삼성과 CJ의 파격 행보는 절박함의 발로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롯데케미칼에 팔리는 삼성정밀화학 노사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 도약을 위해 롯데케미칼의 지분 인수를 적극 지지하고 환영한다”는 이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