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언론의 싸움
노무현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부터 대통령 후보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4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줄곧 언론과의 싸움을 벌여왔다. 지난 23일에는 신년연설에서 군사독재가 무너진 이후 언론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해 시민과 정부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지적한 후 특권과 반칙의 구조를 해소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라면서 언론이 사주의 언론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이 될 때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에 대해 언론은 대통령이 실정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군주적 언론관과 무절제한 언사로 위헌적인 신종 언론탄압을 시도하고 있다고…
시사저널과 전인권이 부르는 ‘이메진’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강건너 불보듯 한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지난 19일 서대문의 맨 길바닥에서 ‘거리문화제’를 보는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7년전 이맘 때 나는 목동의 한 공원에서 열린 ‘문화제’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때도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무관심이었다. 장장 9개월을 지속한 CBS의 파업은 무기한 단식을 거치고서야 끝이 났다. 아니, 더 나빠
개헌논쟁과 공론의 상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발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정치권과 언론계에 한차례 풍랑이 일고 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발표를 연상케 할 정도의 기밀 속에서 깜짝 발표가 있었지만,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언론보도를 통해 조사된 국민여론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노대통령 정책을 지지해온 일부 진보적 신문들조차 이 사안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노대통령의 ‘개헌의제구축’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파급력이 큰 ‘개헌’
표절논란, 언론은 자유로운가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논문 표절시비에 이어 고려대 이필상 총장의 제자 지도논문 표절의혹이 불거지면서 학자들의 연구윤리 문제가 다시금 대두됐다. 학계에선 이들을 감싸거나 동정하는 시선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유는 표절이 ‘관행’이라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당사자들도 ‘당시엔 문제되지 않을 행위’였다고 변명했다. 연구자는 자신이 연구한 것에 대해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이 본업이며, 이렇게 해서 생산된 논문들이 연구자의 기본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저작권은 학계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자기충족적 예언자로서의 언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제목과 달리 계절을 더 타는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로 따지자면 15년하고도 몇 년을 더 지난, 더구나 음치인 나도 해가 바뀌는 때가 되면 그 쓸쓸한 노래가 귓가에 맴도니 하는 말이다. 담배연기처럼 멀어져 가는 것이 어찌 청춘 뿐이랴. 외환위기의 기억도 그렇게 멀어져간다. 1997년 가을 나는 영국에 있었다. 환율의 급변은 외국에 있어야 훨씬 더 실감나는 법이다. 한 갑에 1천원이던 담배값이 갑자기 1만원으로 돌변하는 경험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9월29일 외환시장이 개장 40분 만
미국언론과 한국언론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재임(1977-81)중에는 인기가 없어 재선에 실패했지만 퇴임 후에는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일방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오른 말을 하고 바른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1994년 미국이 북한핵시설폭격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을 때 그가 평양을 방문하고 고 김일성주석을 만나 전쟁재발의 파국을 피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일화이다. 그는 최근 LA타임스에 내가 보는 팔레스타인(How I see Palestine)’이란 칼럼을 실었다. 이 글은 그가 얼마 전 출판
인권문제, 불우이웃돕기식 접근은 곤란
가끔 타 매체 언론인들에게서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요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을 만나 사연을 알리고,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 언론인들이 찾는 사람은 가정 안에서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거나,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이거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이거나, 아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이거나, 집에서 쫓겨난 십대 동성애자거나, 집 밖을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이거나, 쉼터가 필요한 이주여성 등이다. 그런데 언론의 생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요청을 수락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차별과 폭
남북언론인 토론회 보도 제대로 했나
북한 핵 실험 발표직전 필자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한 정보통신 관련 학술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 김책 공과대학 교수들이 발표한 멀티미디어 탐색 기술이 흥미로 웠고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한의 인터넷 서비스 기술을 경청하는 북한 학자들의 눈빛도 새로웠다. 미사일과 핵실험으로 이어지는 급변하는 정치정체로 수차례 연기되다 어렵게 성사된 학술교류였지만, 그 행사는 학회 회원들로부터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어쩌면 ‘교류’ 그 자체가 더 이상 사회적 주목을 끄는 강력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갈파했다. 이 말이 그럴듯 하다면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야 한다. “삶의 뿌리 흔드는 정부”, 20일자 한겨레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희망을 잃었다는 얘기다. 실제의 내 기억에도 6-70년대, 아니 80년대까지 끼니를 걱정하고 군사독재가 정신마저 초겨울처럼 황량하게 만들 때도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삶은 전혀 돌보지 않아도 남만큼은 살 것 같았고 한겨울의 독재조차 우리가 이기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분명 훨씬 풍요
외교와 국방의 요체는 자주이다
한국은 지금 자주와 동맹의 문제로 심히 고민하고 있다. 언론도 물론 예외는 아니지만, 민족자주론에 맞서 자주는 허황되고 실속 없는 것이며 동맹만이 살길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연초에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를 연내에 매듭짓겠다고 밝혔을 때는 큰 물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7월에 그 환수시기로 2012년이 제시되자 소위 ‘원로’를 자처하는 퇴역 장성들과 전직 고위외교관들이 떼를 지어 앞장서서 자주보다 동맹이 더 중요하다며 반대에 나섰다. 또 10월 들어 북한이 핵실험을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