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과장 시비 얼룩진 1990년대 간첩 사건들

지금까지 이른바 ‘간첩 사건’은 애초 수사당국의 발표와 언론보도와 달리 사실이 아니거나 실체가 과장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90년 이후 발표된 간첩단 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4개 사건을 간추려 본다.

김삼석 김은주 남매 사건(1993)
국가안전기획부가 1993년 9월 시민운동가인 김삼석씨와 일본 유학생 출신 여동생 김은주씨가 재일 간첩 이좌영에게 포섭돼 국내 정치·군사 및 재야 운동권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공작금 1백20만엔을 받는 등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잡았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이는 문민정부 최대의 공안 사건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건 발생 1년 뒤 영상사업가인 배인오(본명 백흥용)씨는 자신이 안기부 프락치로 2년간 일했으며 김삼석 김은주씨 사건 조작에 깊이 개입했다고 베를린에서 양심선언했다.
김삼석씨는 국가보안법 상 목적수행 및 국가기밀누설죄를 적용, 4년형을 선고받고 1997년 만기출소했다. 김은주씨는 집행유예로 1심에서 석방됐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을 때는 상세히 보도했으나 백흥용씨의 양심선언은 보도하지 않거나 작게 처리했다. 이 사건은 조사 과정에서 고문 의혹이 제기되는 등 인권 침해 시비도 일었으나 이에 대한 보도 역시 미약했다.

구국전위 사건(1994)
국가안전기획부는 1994년 2월 경희대 강사 안재구씨 등 23명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모두 23명을 구속하면서 이들이 북한의 지령으로 남조선 지하당을 건설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23명 가운데 16명은 이 사건과 무관한 건으로 기소됐다.

당시 북한 핵 위기 상황에서 주요 언론은 안기부의 발표를 보도하면서 ‘색깔론’을 주도했으며 이후 안재구씨의 무기징역 선고만 보도했을 뿐 대다수가 애초 발표와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은 묻혀버렸다.

유엔인권위는 199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의를 열고, 안재구씨 등 구국전위 사건 관련자 9명에 대한 구금이 세계인권선언 5조(고문받지 않을 권리) 9조(체포·추방당하지 않을 권리) 10조(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19조(의사표현의 자유) 22조(결사의 자유)와,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B규약) 7조(고문·인체실험금지)·14조(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위반했다고 결정했으나 역시 보도는 미약했다.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1997)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동아대 졸업생 5명이 일본 어학연수 도중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공작금을 받으며 국내에서 이적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4명은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고 이적표현물 소지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1명은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일부 언론은 이들의 실명을 실으며 경찰과 안기부의 수사발표를 보도했다. “학생운동에 북한 간첩이 침투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또 이 사건은 대통령선거라는 미묘한 시점과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시비 속에서 발표됐으나 이후 간첩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으로 판명돼 질타를 받았다.

H교수 고정간첩 사건(2000)
경찰청 보안국은 2000년 1월 전북지역 C대 H교수가 고정간첩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애초 경찰은 “H씨가 북한 대남공작원에게 포섭돼 90년대 초 노동당에 입당한 뒤 공작금을 받고 각종 기밀을 북한에 보고해왔다”고 고정간첩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H씨가 중학교 은사인 조총련 간부를 만났고, 자택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점을 들어 국가보안법 8조(회합·통신) 및 7조 5항(이적표현물 소지) 위반 혐의로 최종 기소했다. H 교수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됐다.

대부분의 언론은 경찰청 발표대로 ‘30년 고정간첩 적발’이라고 보도했으나 결국 간첩죄 적용을 받지 않은 사실은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H씨는 석방 뒤에도 간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