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기다림을 배우자
방송인 김미화씨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09.02.11 15:24:10
|
|
|
|
|
▲ 방송인 김미화씨 |
|
|
#우리 집은 산 끝자락에 있어서 동네 입구보다 봄이 열흘은 더 늦게 온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한동안 집옆 개울물이 꽁꽁 얼어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늘은 봇물 터지듯 물이 큰소리를 내며 흐른다.
언제 봄이 오나 싶더니, 드디어 봄이 오나보다.
서울에 살 때는 잘 몰랐는데, 나는 이 시골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있다. 농사 짓는 일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배추를 심을 때도 비닐하우스 안에서 씨를 심고 싹을 틔워 모종을 낸다. 배추씨에서 꼬물꼬물 떡잎이 올라 올 때까지 기다림은 즐겁다. 떡잎이 나온 배추모종을 한 개씩 정성껏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심는다.
다음날 아침. 까치들이 와서 연한 떡잎을 쪼아 먹는다. 훠이 훠이! 일껏 심어놓은 배추농사 헛것이 될까 마음 조리며 ‘못된 새’들을 쫓아 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닌다. 새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간 자리의 모종을 뽑아내고 다시 모종을 심는다.
하루 종일 고추밭에 가 있어도 배추밭 모종에 신경이 쓰여 눈이 가재미눈이 됐다. 떡잎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새들도 봐준다.
젓가락을 가지고 하나하나 벌레를 잘 잡아줘야 배추가 잘 큰다. 긴 기다림 속에 배추는 커간다. 이런 기다림의 수고를 알기에 남의 고추밭에 고추도 함부로 따지 못하겠다.
#모처럼 휴일이니 개를 끌고 동네 마실을 갔다.
오후 2시. 동네엔 새들만 날아다닐뿐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마을회관에 모여 화투를 치고 계시겠지. 지금은 아직 겨울이니까.
한참을 걷다가 비닐하우스 안을 보니 파릇파릇한 시금치가 햇볕에 싱싱하다. 주인은 하우스 아래쪽 비닐을 둘둘 말아 공기가 통하게 걸어놓았다. 참 부지런도 하시지. 아직은 추운데 시금치라. 다시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보니 매실나무가 빼곡히 심어진 길가. 메마른 나뭇가지만 앙상한데 나무 밑둥마다 커피색이 나는 흙으로 북돋아 놓았다. 아마도 쇠똥 삭힌 것과 황토 흙을 섞어 놓았을 것이다. 올봄에는 또 탐스러운 매실을 실컷 구경하겠네.
지난주 동네를 걸을 때만 해도 눈이 덮여 있고 땅이 얼어서 언제 봄이 오나 했는데, 농부들은 이미 본능적으로 봄을 느끼고 준비했나보다.
농부는 땅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땅을 파보지 않아도 다 안다. 감자 꽃만 봐도 흰 감자인지 붉은 감자인지, 고구마가 얼마나 굵어졌는지 다 안다. 물속에 연근도 꽃대만 보고 숫연인지 암연인지 안다.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할아버지는 미련스러우리만치 느리게 사신다. 농약도 치고 소 사료도 사먹이면 편하시련만, 그런 것들을 다 싫다하시고, 직접 소처럼 일하면서 소여물을 끓여서 먹이고 콩밭도 메면서 잡초도 일일이 솎아내고, 나뭇짐도 마다 않는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농약을 치면 소먹이 할 꼴들 못 먹여! 농약 친 꼴을 소가 어떻게 먹으라고! 안돼!”
낫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긴 시간을 꼴을 베고 여물을 끓이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가재미눈을 하고 본다. 타닥타닥 소여물 끓이는 부뚜막에 나무 타는 소리가 정겹다.
긴 기다림. 할아버지도 기다리고 소도 기다린다.
농부는 기다릴 줄 안다. 급하다고 해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봄을 기다린다.
그런데 왜 그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안타까운 여섯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까?
왜, 기다리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