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때 일수록 언론다워야


   
 
  ▲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평가(詩評家)인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의 문학평론집인 순오지(旬五志)에는 ‘釜底笑鼎底(부저소정저)’라는 말이 나오는데, ‘가마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고 한다’는 뜻이다. 우리 속담으로 치면 ‘제 눈의 들보’쯤 되는 셈이다.

이 말을 들으면 가장 뜨끔해 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언론사의 ‘시평, 칼럼, 비평코너’를 쓰는 필진들이 아닐까 싶다. 이 칼럼의 제목이 ‘언론 다시보기’ 즉 ‘내 눈에 비친 언론의 유감스러운 모습’이란 뜻이니, 그야말로 필자는 최소한 열 번은 뜨끔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비평이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던질 수 있는자만 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만약 정말 그래야 한다면 오늘날 비판은 모두 수양이 드높은 선승이나, 인격이 고야한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군들 감히 펜을 들 생각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기실 이런 코너를 쓰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경우 대개 일정부분 서로 ‘양해’ 내지는 ‘감수(excuse)’해주는 묵계가 있다. 사회를 비평하거나 혹은 훈수를 두는 자에게 ‘너는 얼마나 깨끗해서?’와 같은 종류의 야지를 놓는다면 세상의 모든 비평 기능들이 사라지고 말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양해, 내지는 감수는 어디까지나 ‘상식적 범주’에서의 양해다. 이를테면 조직폭력배가 ‘평화’에 대한 칼럼을 쓰거나, 살인자가 ‘생명’에 대한 기고를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비판은 최소 ‘현재 시점에서’ 그 문제와 인과관계나 이해관계가 없는 자가 행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예를들어 필자가 어느 신문사 소속 기자라면 이 칼럼이 아예 성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리켜 대개 ‘합리’라고 부른다.

한데 요즘 우리나라 언론을 보면 이런 ‘합리적 상식’이 붕괴되는 현장을 종종 목격한다. 지금 이시간에도 언론사 닷컴에 들어가보면 성인도 대낮에 읽기는 민망한 ‘남자를 한방에 보내는 잠자리의 기술’과 같이, 내용은 몰라도 대강 의미는 이해할 법한 야릇한 기사들이 줄줄이 태그로 걸리고, 19금 인증( 부모님 주민번호만 알면 접근가능한) 컨텐츠들은 그야말로 즐비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자매매체를 일일이 검증 할 수 없다는 언론사의 비합리적인 설명에 동의한다고 해도, 언론사 자체에서 제작한 뉴스들은 가히 독자들의 지적 수준을 희롱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속옷 패션쇼 정도는 웃어 넘긴다 쳐도, 그 사진의 의도가 결단코 예술성이나 스포츠 스타의 출중한 기량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님에도, 발레리나와 스케이터의 특정 포즈에 앵글을 맞춘 클로즈 업 사진들이 버젓히 소개되어 독자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건강하지 못한가’를 고민하게 하고, 심지어는 텍스트 기사마져 태연스레 ‘강간..’ 따위의 천박한 제목으로 뽑혀져 나온다. 심지어 어떤날은 ‘천박한 방송용어’에 대한 비판기사와 요새 뜨는 어느 꽃미남이 ‘연상녀 킬러’라는 자매지의 컨텐츠가 나란히 등장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막장이다.

한데 이런 현상에 대해 개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언론사들의 답은 천편일률적이다. 닷컴의 경우 ‘원가보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말은 사실일 것이다. 광고시장의 축소로 수입이 예전같지 않으니 그나마 광고에만 의존하는 닷컴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에대해 ‘단지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하는 언론사들의 모습은 궁색하기 그지 없다. 왜냐면 언론이 가장 즐기는 일이 바로 그런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사회적 공기(公器)다. 그렇다면 그 공기의 주장을 담아내는 그릇은 공방(公房)이다. 그런데 공방에 공기(公器)와 사기(邪器)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는 어느것이 독약 그릇이고, 어느것이 탕약그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어렵다고 모두가 막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잣대를 들이대기전에 언론은 스스로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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