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 ||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 하시거나, 혹은 소위 ‘감춰진 행간의 의미’를 읽으려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이 무조건적인 존경이나 칭찬의 발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수나 바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술도 예술 나름이기 때문이다. 예술에는 대중예술과 고급예술, 그리고 대중예술이면서 고급예술임을 가장하는 키치(사이비)도 있다. 이들 중에서 가치를 따질 필요는 없다. 대중예술은 당대의 기쁨과 슬픔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어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대중예술의 존재는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고급예술은 어법이 다르다. 당대의 모순을 규명하고 실존의 고민을 고급스러운 예술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고급예술이다. 그래서 대중예술은 ‘흔적’을 등한시하지만, 고급예술은 ‘영원성’을 중시한다. 당대를 넘어 시대를 지나서도 그 어법은 유효하고, 다음 시대에 들어서도 가치가 보존되는 것이 고급예술인 것이다.
그에 비해 키치는 저열하면서 비겁하고, 천하면서 사악하다. 키치는 사실상 대중예술이면서 스스로를 고급예술인양 기만한다. 그래서 키치는 비열하다. 키치는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되며, 당대의 모순을 정면에서 응시하기보다는 에둘러 회피하고 오히려 진실을 무력화시킨다. 키치를 생산하는 예술가는 스스로를 고귀한 듯 위장하며, 그에 중독된 감상자 스스로가 고차원적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키치는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그림처럼 ‘시대착오적’이다. 당대를 당대로 그리지 못하고 과거의 양식을 빌려 설명하며,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키치는 아름다움을 내세우지만 그 아름다움은 똥밭에 내린 눈처럼 기만으로 가득하다. 해가 뜨면 금세 드러날 진실을 두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한다.
이쯤에서 언론인을 예술가라 칭한 필자의 속내는 이미 드러났다.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면성과 시대성이다. 우회하지 않고 피하지 않으며,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이다. ‘이상’처럼 당대를 지각하며,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생텍쥐페리’나 ‘앙드레 말로’처럼 행동하는 것이 역사 속의 우리 언론에 부여된 역할이었다.
그러나 최근 독자들은 혼란에 빠져 있다. 지금 언론이라는 ‘창’으로 드러난 모습은 방치된 시골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모호하다. 언론은 각자 자기 ‘주장과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거의 양식으로 모순을 말한다. 보수언론은 개발시대의 프리즘으로, 진보언론은 민주화투쟁의 그것으로 세상을 분해한다. 하지만 프리즘을 통해 나온 색깔은 그 어느 것도 현재의 빛이 아니다. 언론이 스스로의 ‘판단’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대중예술가는 판단을 개입하지 않는다. 보이는 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고급예술가는 모순을 영감으로 깊이 인식하고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감상자들의 심장을 날카로운 창으로 관통한다. 언론을 통해 대중은 눈을 뜨고 문제를 인식하며, 모순에 부딪치면서 세상을 한 발 나아가게 하려는 의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 언론은 키치적이다. 시대착오적이고, 과욕에 넘쳐난다. 자신만이 진실이라 여겨 독자들에게 판단을 강요한다.
키치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종문화회관의 ‘열주(列柱)’는 그리스 ‘회랑’의 그것처럼 감동을 주지 못하고, 국회의사당의 ‘천장 돔’은 ‘모스크’의 그것처럼 신성하지 못하다. 지금 언론이 전하는 진실도 그러하다. 저급한 키치가 가는 길을 우리 언론이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언론인은 예술가다. 세상을 이해하는 영감이 다르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인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키치적 예술가, 키치적 언론은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소멸하고 만다. 예술은 남는다. 하지만 키치는 사라진다. 이 시대의 독자들이 키치가 아닌, 존경하는 언론, 존경받는 언론인을 갈망하고 있다. 지금이 70년대도 아닌데 이 무슨 시대착오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