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50주년에 신문을 생각한다

[언론다시보기]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오는 4월 19일은 4·19 혁명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4·19’가 나던 해에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내가 나이 60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열 살 소년이던 나에게 4·19는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가족이 서울 한복판에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6학년이던 학생이 유탄에 맞아 죽었는데, 그가 4·19의 최연소 희생자였다.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경찰 무기고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길 건너 골목의 끝에 있던 우리 집 마당에서 무기고 2층 창문에서 총을 들고 세종로 쪽을 겨누던 경관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서울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 6·25 남침 후 적치(敵治)하에서 90일을 살아야 했던 서울사람들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었지만, 교육수준이 높았기에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서울사람들은 야당 지도자인 신익희, 조병옥, 장면, 그리고 윤보선을 좋아했다. 나의 부모도 전형적인 서울 중산층이었기에 그러한 성향은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지금의 한국통신 건물 앞의 공터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광화문 4거리가 앞마당이었던 우리에게 동아일보 건물은 요즘 말로 하면 아이콘 같았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난 후 서울사람들은 대개 동아일보를 보았는데, 우리 집도 그러했다. 4·19 때 시위대는 동아일보 건너편에 있던 서울신문 사옥에 불을 질렀다. 독재정권을 대변했던 신문이 심판을 받은 것인데, 1층이 불탄 건물을 멀리서 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무엇을 알까 하겠지만, 우리 집안은 제법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나의 큰 이모부는 이승만 정권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던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었고, 장면 박사와 가까웠던 나의 외조부는 제2공화국에서 참의원 의원을 지내셨다.

5·16 후 잠시 암흑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말해서 1960년대에 우리나라 신문은 언론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1972년 10월을 기점으로 언론자유는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 어두운 시대에도 동아일보 등 뜻있는 신문들은 진실을 전하려고 노력을 했고, 독자들은 행간에 숨은 진짜 뉴스를 읽으려고 애를 썼다. 1980년대에 광화문 지하도에서 신문을 팔던 상인들은 그날의 중요한 뉴스에 빨간 색연필로 테를 둘렀다. 톱기사는 정부가 주문한 기사이고, 정말로 중요한 뉴스는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신문 행상들은 그것을 용케도 찾아내서 붉은 색연필로 테를 둘렀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신문을 샀다. 이런 세태를 한탄한 ‘거리의 편집자’라는 기명칼럼이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이 닥쳐왔다. 자유언론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언론자유는 활짝 핀 꽃처럼 만개(滿開)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언론자유는 현 정권 들어서 많이 위축된 것 같다. 이제는 언론사 간부를 공안부서로 불러들이거나 기자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고 또 권력에 대해 할 말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사의 경영이 좋지 않은 탓에 광고주가 언론 위에 군림하는 경향도 있어 보인다. 공직자들이 툭하면 제기하는 명예훼손 소송도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언론이 스스로 알아서 자신에 제약을 가하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이명박 정권이 밀고 나가는 세종시 수정 정부안이 발표되던 날 한 신문은 부동산 광고전단을 방불케 하는 지면을 구성했다. ‘4대강’에 관한 보도자세는 더욱 특이하다. 4대강에 대해 보도를 하는 신문은 오직 둘뿐이다. 4대강 사업은 그 규모와 소요예산, 그리고 환경적 영향 측면에서 전에 없던 일인데도 아예 보도를 하지 않는 신문이 많다. 정부정책을 지지하고 또 그것을 비판하지 않는 것도 ‘편집방향’이라면 편집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정책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신문의 편집방향이라면 문제가 아닐까. 자유당 시절의 서울신문의 편집방향은 바로 그런 것이었고, 4·19가 나던 해에 열 살 소년이던 나는 그 결과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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