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잠녀(潛女)의 딸 잠녀를 가슴에 안다
[시선집중 이 사람] 제민일보 문화부 고미 기자
민왕기 기자 wanki@journalist.or.kr | 입력
2010.04.21 14:31:30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없는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 오는 날에도/ 저 바다 저 물결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우는 아기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강관순 ‘해녀가’ 중)
잠녀(潛女)들이 수수 세대에 걸쳐 물질로 길어 올린 생애가 바로 제주다. 그래서 제주 바다에 휘이~ 휘이~ 휘파람 같은 숨비소리 들리면, 제주는 정녕 눈물겨운 섬이다. 거기서 잊혀져 가는 잠녀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제민일보 문화부 고미 기자다.
“다섯 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마음속에선 잠녀를 그보다 더 오래 키웠다”는 고 기자는 2005년 제민일보 창간 15주년 기획으로 시작된 ‘대하기획-제주잠녀’ 시리즈를 지금까지 온몸으로 밀어 오고 있다. 이미 150회를 넘겼다.
기획 당시 데스크가 “할 수 있겠어?”라고 묻자 “물질이라도 할게요”라고 당차게 대답했던 그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 길로 고 기자는 수많은 잠녀들을 만나 그들의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울림이 큰 기사로 전하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던 민초들의 삶과 역사가 고스란하다.
제주 4·3사건 때 물질하러 갔다가 돌아왔더니 남편이 죽고 없더라는 통곡의 날들, 남편과 자식을 바다에서 잃고 남은 식구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물질을 해야 했다던 사연, 일제 강점기 울릉도와 독도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다던 세월까지 녹녹지 않은 삶의 애환들이 기사에 녹아 있다. ‘너무 힘들어 바다를 보고 울기만 했다’던 잠녀들의 사연에 독자들의 눈시울은 붉어지기만 한다.
하지만 그 한 서린 ‘잠녀 문화·역사’가 제주 사회에서조차 ‘천한 직업’, ‘생계를 위한 그들의 선택일 뿐’이라는 등의 인식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실태는 안타깝다. 그래서 잠녀문화를 제주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올리겠다는 게 고 기자의 목표인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물질로 생계를 꾸렸던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잠녀문화·여성문화라는 것 말고도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과 4·3사건 등 역사적 흐름에서 잠녀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 그녀들에게 자존감을 찾아주고 싶어요.”
살아있는 역사를 박물관의 박제로 만들지 말고, 지속 가능한 문화로 후세에 길이 남기자는 게 고 기자의 생각이다. 그런 소중한 자산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의 배려는 턱없다.
“만나본 고령 잠녀들 대부분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잠수병 탓에 ‘내선’이라는 두통약과 신경안정제를 한 주먹씩 먹으며 그들은 지금도 고령의 나이에 물질을 하러 바다 속으로 갑니다. 이제 제주잠녀는 몇 사람 남지 않았어요. 그들이 사라지면 제주의 생생한 역사도 찾을 길이 없겠죠.”
그는 한 기사에서 “계절을 잃은 찬바람이 귀를 때린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다그침인 것 같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고 썼다.
그래서다. 고 기자는 제민일보 차원에서 시작된 이 잠녀 기획이 제주 잠녀를 지역무형문화유산, 나아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 기자 스스로가 잠녀의 딸이다. 할머니가 잠녀였고 어머니는 잠녀는 아니었지만 그 할머니에게서 물질을 배웠다. 그 손녀는 잠녀의 핏줄로 태어나 기자가 돼 잠녀들의 애환과 삶을 빼곡히 기록하고 있다.
사회부 기자 시절, 새벽에 아이를 업고 사건 현장에 나가 취재를 했다던 일화가 말해주듯 그는 끈질기게 제주 잠녀를 온전한 역사로 기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고 기자는 “어떻게든 현장에 가고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먼저 가슴과 귀를 여는 기자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