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칼럼은 어디에 있나?
[언론다시보기] 박상건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박상건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0.11.15 15:16:59
|
|
|
|
|
▲ 박상건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
|
|
요즘 뉴스에서는 시장과 서민 이야기를 접하기 힘들다. 사건사고 기사뿐이다. 이런 모자란 부분을 메우며 독자와 교량역할을 하는 게 칼럼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고급풍의 언어 유희일뿐이다.
칼럼은 기사로서 여론형성 기능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마당이자 기둥역할을 한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서 칼럼니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누리면서 책임도 진다.
신문사들은 “본란에 실린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토를 달지만, 이는 건설사 모델하우스 홍보물에 “모델하우스 모습은 실제 시공과 다를 수 있다”는 표현과 다를 바 없다. 책임 없는 글은 인격과 양심에 반한다. 미국 전국논설위원회는 사설칼럼집필원칙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지킨다. 칼럼의 중요성 때문에 세계 최초 칼럼전문지인 뉴스로(www.newsroh.com)가 창간될 정도이다.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는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의 죽음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인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어김없는 사람의 사람다운 도리라고 강조한다. 그 역리(逆理)를 바로잡기 위해 국회도 불 밝히고 종교 법률전문직 단체도 연대에 대열에 나서라, 언론도 ‘제약’의 무덤에서 헤쳐 나오라, 나의 중심도 권력 쪽에서 내려잡혀야 한다면서 그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죽음과 삶이라고 울부짖는다.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시 29년 전 ‘김중배 칼럼’을 읽는다. 민은 끌려 다니는 장기판의 ‘졸’일 수 없다고 항변한다. 거부의 회향(廻向)을 모르는 ‘졸’일 수도 없다. 민은 장기판의 ‘궁’이라고 웅변한다. 1995년 4월7일 신문의 날 한겨레 정연주 워싱턴특파원이 쓴 ‘기자인 것이 부끄럽다’ 칼럼은 권력에 재갈 물린 것도 아닌 선정적 상업주의의 노예가 되어 사실보도를 하지 않는, 대결의 극단으로 휘몰아가는 기자 집단에 속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이런 반성문도 읽을 수 없다. 2000년 ‘한국신문의 조폭 행태’라는 제목의 칼럼에서는 70년대 주먹이 지배하던 조폭행태를 닮은 굴종과 왜곡의 수구언론, 사주와 중간보수의 붓의 폭력성, 살인적 판매경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신문시장을 통탄하며 젊은 언론인들에게 일어나 저항하라고 촉구한다.
올 3월 한겨레 홍세화칼럼 제목은 ‘아픔’이었다. 김용철 변호사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개한 김상봉 교수 칼럼이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해 진보언론의 정체성 논란이 일자 이는 한국 진보언론이 겪는 존재론적 아픔의 속살이라고 의견개진한 칼럼이다. 진보언론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우리 언론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이건희 회장을 특별사면 명분으로 평창 올림픽 유치를 내걸자 한 통신사 뉴욕특파원이 ‘평창은 이건희를 거부하라’는 제목의 특파원칼럼을 송고했는데, 웹에 보도됐다가 윗선의 지시로 바로 사라졌다. 삼성 고위층이 언론사를 방문해 빼달라고 했고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 전말이다. 스포츠대기자 출신의 칼럼은 그렇게 포털에서도 종적을 감춰 ‘유령칼럼’이 되었다.
당시 칼럼은 자크 로게 위원장 취임 이후 IOC가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끈질긴 자정활동을 펴온 시기에 조세포탈혐의 유죄확정으로 자진해서 IOC위원직 정지를 요청한 장본인을 IOC가 밀어주고 싶어도 밀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고, 경쟁 개최국 후보도시들에게 빌미가 된다는 점에서 평창은 올림픽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당당하게 승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인 장명수씨는 ‘칼럼니스의 꿈’이라는 칼럼에서 칼럼니스트는 마감에 목졸려야 하고, 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고, 온갖 일들을 비판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고약한 직업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칼럼니스트의 참담함과 결단력의 헌신이 있기에 독자는 칼럼 하나에 나르시즘에 빠지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보다 더 진정성 있는 언론보도가 어디 있으며 쌍방향 오픈저널리즘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국민은 나날이 전문적이고 다양한 시각으로 글로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변화는 참으로 더디고, 더디다. 자사 이기주의적 종편전쟁이 우리네 삶과 언론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지금 국민의 목마름은 언론자신의 고정관념과 구태로부터 자유이지 언론사의 자유가 아니다. 새벽이슬에 젖은 관습을 훌훌 털어낸 휴머니즘과 향기에 젖은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