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자연

[언론다시보기] 김보라미 변호사



   
 
  ▲ 김보라미 변호사  
 
다시 그녀의 사진을 검색해서 찾아 보았다. 1980년 1월 25일 출생 2009년 3월 7일 사망, 출연작 네 편.

도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그녀의 프로필 사진은 참 예뻤다. 그녀가 여자이며, 막 대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약한 사회적 지위에 있기에 그녀로부터의 접대를 당연하게 여겼을 힘 있는 남자들도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자살을 할 정도로 비인간적으로 대우한 그 남자들이 생각했을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는 당연히 그런 접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너무나 쉽게 그런 일들을 경험해서일까.

그녀의 편지라 일컬어지는 문건이 다시 언론에 의해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2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한때 그토록 분노했던 일에 대해 그동안 거의 잊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참 당혹스러웠다.

그녀의 자살 이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수사, 그녀의 자살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에 대한 글 삭제, 굳이 사망한 그녀의 이름을 앞세운 리스트명칭, 그녀의 자살과 얽혀 기소된 자들에 대한 경한 선고형 등을 보면서 한때 느꼈던 불쾌감들이 꾸역꾸역 밀려 올라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그녀의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나 사회적 해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부분은 입증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일부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자리에, 사대강 사업과 관련된 내부 고발을 한 뒤 징계를 받은 김이태 연구원, 감사원의 감사비리를 밝힌 후 구금되었던 이문옥 전 감사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등에 의한 죽음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와 바꾸어 놓아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거대한 강자로부터 받는 억울함과 분함을 호소하는 것은, 그들이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소위 그녀의 편지기사는 며칠 전 수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마치 있어서는 안 되었을 문제제기처럼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마도 한동안 분노했던 사람들도 그녀로 인해 느꼈던 먹먹했던 감정을, 어쩌면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부당한 사회적 강자에 대한 불만들을, 이미 끝난 일로 치부한 채 조용히 묻어 두고, 또다시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잠시 그녀의 편지기사를 쓰면서 기자가 가졌을 ‘판타지’를 떠올려 보았다. 현실에서 문제의 편지는 위조로, 그 편지의 위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도했다는 책임을 물어 보도국장, 데스크가 중징계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보도가 진실이었다면 수사기관은 수사를 적극적으로 시작했을 것이고, 일반인들은 그녀의 억울함과 분함을 다시 한번 공론화하면서 그들의 판타지도 떠올렸을 것이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실 말고는 2년 전과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공간을 천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의 요구들에 화답하고, 같은 처지의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권력에 의하여 뭉개지지 않고 펼쳐 갈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천국은, 201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표현대로, 영원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개인들의 강하게 열망된 판타지들은, 비록 실수와 실패가 있더라도 다른 곳에 있을 천국을 이곳으로 끌어당기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고 장자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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