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히 즈려밟지 마세요

한국기자협회 온라인칼럼[엄민용의 우리말글 산책]



   
 
  ▲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봄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에 아직 냉기가 서려 있지만, 푸진 햇살에 따뜻함도 배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생명의 소리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이런 봄이면 문득 떠오르는 꽃들이 있습니다.

진달래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진달래’하면 시인 김소월도 함께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이 아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는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즈려밟다’가 “위에서 내리 눌러 밟다”라는 의미의 바른말인 줄 아는 듯합니다.

하지만 ‘즈려밟다’는 바른말이 아닙니다. ‘즈려밟다’와 함께 많이 쓰이는 ‘지려밟다’도 바른말이 아니고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즈려밟다’의 바른말로 ‘지르밟다’를 삼고 있습니다. 이때의 ‘지르-’는 ‘내리누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이나 버선 따위를 뒤축이 발꿈치에 눌리어 밟히게 신다”를 뜻하는 말이 ‘지르신다’이고, “아랫니와 윗니를 꽉 눌러 물다”를 의미하는 말이 ‘지르물다’입니다.

참, 진달래의 뜻이 뭔지 아세요? 진달래는 “달래꽃 중에서 최고의 꽃”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이 붙어 있으니까요.

이와 달리 진달래의 ‘짝꿍’이라고 할 수 있는 ‘개나리’는 “나리꽃 중에서 가장 못났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왜 우리말에서는 개살구·개떡·개고생 등처럼 좋지 않은 것에 ‘개’를 붙이곤 하잖아요. 이런 것을 알면 우리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봄을 대표하는 꽃에는 민들레도 있습니다. 노란 꽃잎이 참 정겹고, 꽃이 피기 전의 식물체는 한약재로 쓰이기도 하죠.
이 ‘민들레’하면 ‘홀씨’가 함께 떠오릅니다. 가수 박미경 씨가 부른 ‘민들레 홀씨 되어’ 때문이겠지요.

그런데요. 이 노래가 워낙 많이 불리다 보니, 민들레꽃이 진 뒤에 생기는 ‘하얀 뭉치’를 홀씨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민들레가 홀씨로 번식한다고 아는 분들도 많고요.
하지만 노란 꽃이 진 뒤에 생기는 흰색의 털 뭉치 같은 것은 홀씨가 아닙니다. 민들레는 절대로 홀씨로 번식하지도 않지요.

홀씨를 한자말로는 ‘포자(胞子)’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이끼류나 곰팡이류가 이 포자로 번식합니다.
민들레는 분명 꽃이 피는 식물입니다. 꽃이 피니 당연히 씨앗이 있습니다. 하얀 털 뭉치가 바로 씨앗들이 엉켜 있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민들레는 절대로 홀씨로 번식하지 않습니다. 씨앗으로 번식합니다.
봄에 흔히 볼 수 있는 꽃 중에는 철쭉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철쭉이라고 부르는 꽃에는 사실 몇 종류가 있지요. 흔히 ‘연산홍’이라 부르는 꽃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외에 철쭉 말발돌이 연산홍 등 모두 1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중앙일보) “개금동에 사는 한 주민은 정자 옆에 조성되는 화단에 심으라며 연산홍 300그루를 기중했고…”(한겨레) “괴산군에서도 2002년부터 산철쭉, 산수유, 연산홍 등으로 10㏊가량의 꽃동산을 조성해 놓아…”(연합뉴스) 등에서 보듯이 봄이면 신문들이 ‘연산홍’과 관련한 기사를 쏟아냅니다.


하지만 ‘연산홍’은 바른말이 아닙니다. 네이버의 백과사전은 ‘영산홍(연산홍)’으로 적어 놓아 마치 ‘영산홍’과 ‘연산홍’이 모두 바른말인 것처럼 다루고 있으나, 실제는 ‘영산홍’만 표준어입니다. 말 그대로 “산을 붉게 비치게 한다”는 한자말 ‘영산홍(映山紅)’이 이 꽃의 진짜 이름입니다. 이 꽃을 ‘왜철쭉’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연산홍’보다 더욱 흔히 잘못 쓰는 꽃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사루비아’라는 꽃입니다. 약불꽃·서미초(鼠尾草)라고도 불리는 이 꽃의 끄트머리에서 단물을 빨아 먹은 기억이 많은 사람에게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꽃의 바른 이름은 ‘샐비어(salvia)’입니다. ‘샐비어’를 ‘사루비아’로 부르는 것은 일본의 영향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것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ㄹ’ 받침 발음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샐비어’를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고, ‘사루비아’라고 소리 냅니다.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쓰는 것이지요.

우리가 ‘ㄹ’ 받침을 소리 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샐비어’로 충분히 소리 낼 수 있는데도 일본 발음을 그대로 적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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