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질의 정석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MBC 논설위원


   
 
  ▲ 신경민 MBC 논설위원  
 
김미화씨는 2011년 4월 시점에 라디오 진행자로서 자진사퇴를 택했다. 물론 김씨는 본업이 아닌 시사 진행자를 충분히 오랜 동안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다. 유별난 점은 인사 잡음으로 소란하던 중 생방송 4시간 전 전화와 문자로 관련자에게 알렸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매우 드문 자진사퇴의 유형이어서 삼척동자가 봐도 범상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인가부터 토끼몰이 식으로 사람과 자리를 빗자락질하는 (‘물러난다, 쫓겨난다, 몰아낸다’로는 부족해 정권핵심에 정통했던 인물의 말을 빌려 이 표현을 쓴다) 방식들이 어엿하게 횡행한다. 한 쪽에는 스스로 걸어 나가는 ‘자진사퇴’, 다른 한쪽에는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는 ‘교체결정’이 있다. 양 방식에 여러 유형이 있고 양 방식 사이에 많은 변종이 존재한다.

나 자신이 만 2년 전인 2009년 4월 시점에 지상파 방송의 메인 앵커에서 빗질 당했다. 내가 겪은 방식은 김씨와 다르게 교체결정이었다. 교체결정 중 가장 복잡하고 과격한 유형으로는 정연주 KBS 전 사장일 것이다. 가동 가능한 공적, 사적 조직과 어처구니 없는 방법이 총동원돼 그를 빗질했고 결국 기소와 민형사 재판까지 갔다. 김씨 경우를 포함해 그 동안 듣거나 본 청소의 사례를 보면 교과서적인 ‘빗질의 정석’이 존재하고 있고 계속 진화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빗질할 목표를 결정하면 공적, 사적 조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담당 부서 간에는 업무분담과 협조가 선진적으로 이뤄져 한 몸처럼 움직인다. 민관의 협력은 눈부시다. 목표인 당사자는 물론 가까운 이들까지 과거와 현재, 공적 결정과 사적 책임, 소유와 인간관계가 첨단 현미경과 첨단 망원경을 동원해 비밀스럽게 분석된다. 찻집, 술집, 식당, 가게는 기본이고 잘 부르는 노래까지 알아내면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확인한다. 디지털 시대에서는 역설적으로 추적과 분석 작업이 더 손쉬워지고 빨라지고 빈틈이 거의 없어졌다.

이와 동시에 목표에게 법적, 행정적 공세가 파상으로 펼쳐진다. 있는 법, 없는 법이 다 동원되면서 이심전심,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법의 유무와 적법성 해석보다는 목하 누군가가 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서늘하도록 위협적이다. 이 단계에서 사법부의 존재가 큰 위로나 힘이 되지 못한다.

목표를 더 힘들게 하는 위협은 정서적인 묻지마 공세이다. 가장 고전적이고 흔한 방법이 빨갱이로 모는 것이다. 이 공세가 맞다면 전 국민의 상당수가 빨갱이여서 국가가 위험할 지경이다. 다른 단골 공세는 지연을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특정 지역 출신일 경우 심하게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다. 또 사람에 대한 흠집이 따라간다. 술을 잘 먹으면 헤프거나 타락했고 술을 먹지 못하면 소통과 리더십이 모자라다는 식이어서 무차별 샤워와 비슷하다.

동시에 목표에게 회유하거나 다른 자리 또는 기회를 미끼로 내민다. 목표의 상당수는 이 정도에서 함락되기 쉽다. 이쯤에서 빗질의 외부작업자인 누군가와 내부수주자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조직 내부에게는 명시, 묵시적 메시지가 던져진다. 요즘 언론의 살림살이가 힘들어지면서 분명하고 치명적인 메시지는 돈줄이다. 실제로 기업과 공공 광고가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대면서 삼베바지에서 방구 새나가듯 빠져나갈 경우 심지를 지닌 조직도 중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조직원들이 수군거리면 목표는 숨거나 기댈 곳이 없어져 견디기 어렵다. 전략서에 나오는 내부 이간이고 밥그릇을 때려 부수는 전통적 수법이다. 목표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녹아난다.

이제는 대청소 시기와 방식의 선택만 남았다. 청소를 수주해 온 적극적 맹렬 요원과 동참하는 소극적 동조 요원이 작업을 나눠 빗질에 들어가고 책임 있는 다수는 대부분 눈을 깔거나 침묵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라고 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은 시청률, 시청자 요구변화, 경쟁력, 세대교체 같은 근사한 명분을 내걸거나 비용절감 같은 현실적 이유를 댄다. 또는 공정성, 객관성, 중립성처럼 그럴 듯하면서 실체를 알기 힘든 추상적 슬로건을 든다. 명분은 넘치도록 많아 어떤 경우에나 딱 들어맞게 택할 수 있다. 그리고 금방 잊혀지기 때문에 나중에 책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빗질의 정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증거는 물론 흔적까지 싹싹 쓸어낸다는 점이다. 대청소 기간이 지나면 빗질은 성공했고 빗자락은 도구함에 숨는다. 대부분 언론들은 주로 공식 설명만을 전한다. 그래서 언론과 여론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가고 여론조사는 겉돌게 된다.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쓸려가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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