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보도지침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MBC 논설위원


   
 
  ▲ 신경민 MBC 논설위원  
 
땡전뉴스와 보도지침이 공식으로 지배하던 1980년대 중반, 나는 1년여 뉴스데스크의 단신모음 코너인 ‘보도국입니다’를 맡았다. 독자들이 신문 맨 아래 1단부터 봤듯이, 시청자들은 땡전을 피해 오후 9시15분 이후 뉴스를 보기 시작해 보도국 코너와 이어지는 김동완 통보관의 날씨예보를 열심히 봤다.

이 코너에는 보도지침에서 1단이나 노비디오로 처리하라는 기사, 곧 국민 마음의 톱뉴스와 중요기사가 대부분 처리됐다. 그 덕택에 나는 진짜 뉴스를 전하는 ‘새끼앵커’로 각인돼 출입처에서 “보도국입니다가 오셨다”고 반길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보도지침의 음덕을 본 셈이다.

당시 대부분 언론의 편집은 보도지침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회사 수뇌부는 시대에 걸맞은 참신하고 미래지향적 편집을 하라고 요구했다. 지금까지의 구각에서 벗어나 ‘찌질한 기사’를 과감하게 빼라고 주문했다. 구체적으로 찌질한 기사란 보도지침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특종이 쓰레기통으로 직행
데스크들은 화끈한 특종을 가져오면 목숨을 걸고 내주겠다고 공언하면서 요즘 젊은 애들은 게을러서 특종을 할 줄 모른다는 평가를 꼭 덧붙였다. 특종이 나오면 “확실하냐? 틀리면 네가 책임질래?” 내지는 “왜 특종인지 설명해 보라”고 따졌다. 취재기자가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많은 특종이 고무판 밑에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편집회의는 기사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재미가 있는지, 그림이 좋은지를 물었다. 부수고, 때리고, 죽이고, 벗기는 그림이 늘어나고 꾀꼬리가 울거나 아프리카 얼룩말, 북극곰, 물개가 뛰놀았다. 강대국 중심사고에서 벗어나라는 국제뉴스 주문은 딱딱한 기사를 전하는 특파원 보도와 외신을 제치고 여러 나라의 재미있는 그림을 소화하라는 뜻이었다.

기사를 물 먹으면 대충 넘어갔지만 좋은 그림을 놓치면 한심한 죄인이 됐다. 진기명기와 동물의 왕국은 좋은 자리에 마음껏 길게 나가면서 보통 사람의 슬픔과 한숨, 분노는 사라져갔다.

정권 수뇌부의 취미 무조건 기사화
다음으로 중요한 편집방향은 생활 밀착형 기사의 발굴이었다. 넘치는 건강과 의학정보로 의학채널을 방불케 했다. 동물실험 또는 임상실험 중인 치료법이 나가면 환자들은 국내외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곧 실망과 절망을 느꼈다. 부동산, 증권, 채권 등 돈과 관련된 기사는 무조건 들어갔다. 꽃, 강아지 키우기 등 수뇌부의 취미를 생활형이라는 이유로 밀어 넣었다.

사건기자는 걸핏하면 훈훈한 소식을 찾아야 했다. 대개는 ‘앵벌이 기사’로 변했다. 다만 훈훈한 기사에 너무 가난하거나 힘든 소식이 들어갈 경우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해서 답답한 사람, 눈치 없는 친구라는 핀잔을 들었다.

사건, 국제, 문화부가 항상 바쁘게 움직인 반면에 본격적인 정치, 경제, 사회 기사는 재미가 없다거나 관심이 떨어진다면서 뒤로, 뒤로 밀어냈다. 야권이나 재야의 움직임, 성명, 비판은 보도지침과 상관없이 찬밥신세였다. 심하게 눈치가 보이는 기사에 대해서는 오전에 앞자리에 넣었다가 오후에는 신선도가 높은 새 기사로 채운다면서 중후반으로 밀어낸 뒤 뉴스진행 중 이런저런 핑계로 빼냈다. 뉴스진행 PD가 내린 실무적, 기술적 판단이라서 편집자의 의지와 관련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다 보니 편집회의에 중요 일정이 올라오지 않고 편집에서 힘 있는 사람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심지어 거두절미하고 “곧 중요한 보도지침이 나온다”는 예고가 버젓하게 보고됐다.

자기 검열이 심해지고 횡행하면서 일선 기자들은 기사를 쓰지 않고 취재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다른 기자들의 기사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자료를 근사하게 뉴스로 만들지를 골똘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임무와 천직으로 여겼다. 급기야 전체 보도부문의 기사가치판단, 취재, 기사작성에 마비와 경색이 왔다. 방송사가 아니라 전파상 내지는 뉴스 프로덕션이라는 자조가 나왔다.

마음속 보도지침 지워지지 않아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방송은 대국민 반성문을 썼다. 그때 뉴스를 놓고 밤새워 비분강개했던 동료 선후배들이 세월이 흐른 현재 방송사의 수뇌부로 올라갔다. ‘땡전뉴스’와 ‘보도지침’은 사라졌지만 지금, 여기에 과거 방송의 부끄러웠던 모습이 슬그머니 다시 나타나고 있다.

언제 어디선가 본 모습이어서 전혀 낯설지 않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과거 편집자들이 독재에 밀려 어쩔 수 없다는 죄의식을 가졌지만 지금 편집자들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최소한의 미안함을 갖지 않는다.

열변을 토했던 그들 안의 정의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방송이 반성문을 다시 쓴들 바뀔 수 있을까. 마음속 보도지침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언론, 특히 방송 바로 세우기는 과연 가능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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