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한 방송은 권력의 얼굴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MBC 논설위원


   
 
  ▲ 신경민 MBC 논설위원  
 
1987년 초 ‘박종철 사건’은 우리 정치와 민주화에 자취를 남겼다. 지적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박종철 사건과 관련보도는 우리 언론, 특히 방송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닌다. 다만 아무도 본격적으로 말하지 않아 이를 지나치고 있다.

요즘 언론, 특히 방송보도와 괴이한 방송사 결정에 대한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이를 복기하고 짚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박 군 사건의 1보는 당시 석간인 중앙일보 1월 15일자 2판에 처음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회면 왼쪽 상단 만화 옆에 조그맣게 2단으로 나왔다. 상식적이지 못한 이런 편집은 신문사의 여건과 눈치를 봐야 하는 언론의 분위기를 웅변으로 말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임은 분명했다. 외국 통신들이 서울발로 보도하면서 막거나 감출 수 없었다.

박종철 사건 보도지침…동아일보의 용기
문제는 1보 이후 보도지침이었다. 보도지침은 전 해인 1986년 9월 ‘말’지 특집호로 폭로되면서 국내외에서 파장을 일으켰지만 관련된 전·현직 언론인 세 사람이 12월에 모두 붙잡혀 구속됨으로써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다.

이들의 구속사실이 보도지침으로 거의 보도되지 못할 정도였다. 박 군 사건의 성격상 사전지침은 나올 수 없었고 정권은 그날 오후 숙의를 거듭한 끝에 사회면 4단으로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을 내놓았다.

신문들은 도리 없이 이 지침을 지켰다. 다만 동아일보는 달랐다. 4단 지침을 지키되 사회면의 대부분에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소제목 단락을 나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담아냈다. 기자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뱀장어형 편집에 박수를 보내면서 투철한 판단과 용기를 지닌 신문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역시 동아일보’라고 칭찬했다.

결국 보도지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구영 서울 지검장이 물고문 증거를 공식으로 인정하면서 지침을 낸다는 작업이 무의미해졌다. 보도지침이 실질적으로 사라지면서 동아일보가 주도하는 속보는 언론과 보도의 진수를 눈부시도록 보여줬다. 적어도 신문에 관한 한 보도지침은 무력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종철 사건 보도 방송사는 철저한 방관자
방송의 사정은 달랐다. 15일 다른 뉴스에는 허용하지 않으면서 오직 밤 9시 뉴스에 비디오 없이 단신 처리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MBC 보도국은 당시 내가 진행하던 내외신 모음 코너인 ‘보도국입니다’에서 1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진행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디오가 없다는 약점과 간결하게 쓰라는 기사작성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길고 모호하게 한 글자라도 더 보도하는 것이었다. 상대사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그나마 나가지 못했다. 방송기자, 검찰 출입기자로서 일말의 위로를 삼는다면 그 짧은 코멘트가 신문이 지역에 배달되기 이전에 전국적으로 그의 죽음을 처음 알렸다는 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방송은 박 군 사건에 관한 한 철저한 방관자였다. 방송은 신문과 다르다는 논리로 신문에 통용되지 않는 보도지침이 펄펄 살아있었다. 보도지침이 전두환 정권과 함께 공식으로 사라진 이후에도 지침성 지침은 안면이란 이름으로 방송에서 오래 남아있었다. 공영방송이란 슬로건은 빈말이고 슬로건에 그쳤다. 민주화 이후 방송사는 이를 반성하고 사과했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박 군 사건 첫 기사를 보면서 중앙일보 사회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간 나와 당신은 물론이고 사장, 국장까지 줄줄이 불려간다”고 할 상황과 필요가 없어졌다. 보도지침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언론과 보도는 더 상식적이고 자유로워지면서 신문에서는 더 많은 동아일보가 나타나고 방송은 BBC 흉내라도 내야 할 것이다.

현실은 동아일보도, BBC도 찾을 수 없는 엉뚱한 곳으로 왔다. 민주화 이후 대부분 신문은 경쟁과 내부 생존욕구에 빠져들면서 저널리즘을 쉽게 버렸다. 방송은 사회변화의 덕택에 젊고 올바른 목소리를 실어내는 듯했다.

방송의 괴이한 모습은 필연적 결과
KBS는 사장 해임권을 없애고 MBC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1988년 방문진(방송문화진흥회)이라는 상부구조를 만들어 스스로 사장을 뽑겠다는 자율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이 공개적으로 파견하는 타율의 집합체가 되면서 집권당과 세력이 어떤 경우에나 다수라는 이름으로 승리하는 전장이 됐다.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는 합리적 지배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방송의 괴이한 오늘 모습은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정치권력의 힘을 막아낼 수 있는 구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만들어내야 하고 정치권은 강제적으로라도 지배욕심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슬로건은 범람하지만 이를 구체화할 행동계획 곧 액션플랜, 더구나 구조를 바꿀 만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박종철의 희생 이후 우리가 잠시 민주언론을 꿈꾸다가 계획 없이 허둥대던 중 꿈을 깼는지 모른다. 왜 실패했고 희망을 주지 못하는지 복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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