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영방송의 실패를 보고 있다

[언론다시보기]신경민 MBC논설위원


   
 
  ▲ 신경민 MBC 논설위원  
 
MBC의 PD수첩팀이 ‘황우석 사태’를 보도하고 있을 때였다.
황우석 관련 내용이 오보로 드러날 경우 당연히 회사는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당시 담당 PD와 도와주던 기자를 압박했던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는 황 교수가 자살할 경우였다. 그렇게 된다면 진실의 추가 황 교수 쪽에 멈추면서 회사에는 돌과 화염병이 날아들게 되고 여야 정치권과 관료들이 MBC 문을 닫는 수순에 돌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안도한 계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황 교수가 누워서 서울대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아, 이 사람은 절대 혼자 죽을 위인이 아니로구나”라고 판단했고, 다음으로 “우리 보도가 진실이었구나”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이후 전문용어로 가득 찬 기자회견 등 전개상황은 이 결정적 계기와 예측을 확인하는 수순에 지나지 않았다.

경찰, KBS의 도청수사 ‘체면수준’
KBS의 도청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계기가 있었다.(사실 따져보면 KBS의 대응 전반과 그 중에서 벽치기 주장, 면책특권 주장 등 여러 계기가 있었다.)

그 중 결정적 계기는 여러 설명과 주장이 분분한 속에서 해당 기자가 문제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동시에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순간이었다. 경찰이 택시운전사를 찾아 그런 사실이 없었음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바로 그 순간 음모설에 익숙한 우리 국민 대다수는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KBS 내외부에서 이뤄진 초기 여론조사를 보면 83%가 도청사실을 믿는다고 답했다가 그 이후 조사에서는 믿는 숫자가 훨씬 늘어났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고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리라고 답한 점이다.

세상사에는 음모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돌발하는 법이라서 수사조정권 다툼에 휩싸였던 경찰이 위신을 세우기 위해 기대보다 조금 더 열심히 수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머독 회사의 도청과 전 세계로 번져가는 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 뉴스는 무시하면 그 뿐이고 경찰수사는 성의 보이기와 체면 수준에 그칠 뿐이다.

‘마음의 檢警과 마음의 法廷’서는 종결단계
결과적으로 요즘 흐름을 보면 음모설 신봉자의 예상은 대충 들어맞아 ‘KBS 도청설’ 내지 ‘KBS 도청의혹’으로 그치게 될 것 같다. 해당 기자가 도청을 거론하는 이들에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점으로 미뤄보면 이 사안은 무혐의, 불기소, 무죄, 사면으로 이어지는 ‘흐지부지 컨베어벨트’에 올라탔다. 동시에 국민들이 품고 있을 ‘마음의 검경과 마음의 법정’에서는 이미 수사와 재판 결론이 났고 종결단계에 들어섰다.

아무리 KBS 도청의혹으로 결론이 난다고 하더라도 논의를 해야 할 근본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도청의혹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대응은 별도의 범죄에 해당한다.

취재물 여당에 넘겨준 행위 ‘범죄’
이 사안에서 만약 야당 회의를 엿듣고 이를 보고한 행위가 있었다면 이는 취재로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이 보고를 문서로 만든 행위가 있었다면 회사 내부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취재물을 여당에 넘겨준 행위가 있었다면 정당화할 길이 없는 범죄로 성립한다.
관련된 젊은 출입기자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사안을 호도하기 위해 젊은 기자에게 지나친 책임이 지워져 그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고 그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는 내부 풍토가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다. 만약 KBS가 억울한 의혹을 받았다 해도 공영방송의 대응이라기보다 동네조직의 우왕좌왕하는 대처로 보인다.

도청의혹은 KBS의 시청료 인상과 관련해 생긴 일이다.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청료가 80년에 책정됐고 김영삼 정권에서 전기요금에 병과하는 제도도입으로 사실상 인상됐지만 그동안 여건변화와 물가인상으로 현재 태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에 보여준 KBS 일부 언론인의 행태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공영이란 직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주인이 없는 관계로 이 회사는 우리 것 또는 ‘내가 주인이다’는 의식이 존재하고 이 의식이 직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주인의식이 비뚤어질 경우 조직원들이 존재이유와 법을 무시하고 오직 조직과 경영층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나간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줬다.

반대하는 야당 의원에게 “다음 총선에서 보자”고 한 어느 KBS 기자의 말은 작은 권력에 안주한 채 영혼을 버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시청료, 전기료 연동 재검토해야 할 참”
결국 우리는 지금 공영방송의 실패를 보고 있다. 국영을 버리고 공영으로 옮겨온 지 30년, 곧 한 세대를 넘어서 흉내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우리가 공영방송에 아주 싼 시청료를 내지만 인상을 논의하기 이전에 방송이 그 값을 하고 있는지 따져보고 전기료 연동을 재검토해야 할 참이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현상으로 종편이 연말연시에 방송을 시작하면 공영방송의 의미는 현실에서 상당부분 퇴색한다. 따라서 공영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공영실패의 이유가 뭔지를 따져 생각해봐야 할 시점과 계기가 됐다.

우리 민주화에 문제가 있는지, 정치권력이 뒤길 행패를 부리는지, 자격 없는 방송인이 넘치는지, 운용에 잘못이 있는지 따져야 한다. 그래도 공영을 버릴 수 없다면 제대로 공영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와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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