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맨얼굴
[스페셜리스트│경제]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경제학 박사
곽정수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3.01.30 13: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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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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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그룹의 이마트가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직원들을 불법 사찰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내부 문서와 이메일이 공개됐다. 지난 1993년 창립 이래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며 직원을 사찰해온 전근대적 경영행태의 곪았던 종기가 드디어 터진 셈이다. 불과 며칠 전 정용진 부회장 등 그룹 최고경영자들이 줄지어 서서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책임경영’을 외쳤던 직후여서 그 충격을 더해준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손자는 사립학교인 영훈국제중학교에 사회적 배려대상자(사배자) 전형으로 합격했다. 원래 사배자 전형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삼성은 이 회장의 손자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비경제적 배려대상자(한부모 가정 자녀)에 해당돼 뽑혔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부자의 손자가 사회적 배려대상자라는 것은 해외 토픽감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년사에서 “사회 각계와 자주 소통하고 더 많이 협력해 나갈 때 삼성은 믿음을 주는 기업, 사랑받는 기업이 될 것”이라며 사회책임을 강조했다.
삼성과 신세계의 사건은 입으로는 사회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시하는 재벌의 맨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데는 재벌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도 재벌이 과거의 타성을 벗지 못하는 것은 국민의 선호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세상 어느 나라보다 친기업적이다. 대한민국 재벌은 ‘별’이 여럿인 총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선진국 같으면 이미 몇번이나 회사간판을 내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 한국도 이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대한상의가 최근 발표한 국민들의 기업호감도는 2009년 이후 4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재벌의 또 다른 착각은 사회책임을 등한시해도 재벌체제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지난해 사상최대의 실적을 거두었다. 두 회사의 영업이익은 40조원에 육박해, 논란을 빚고 있는 박근혜표 복지예산(5년간 135조원)을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2%로 곤두박칠쳤다. 소수 대기업의 호성적이 결코 국민을 먹여살릴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창업자들의 탁월한 기업가정신이 빛났던 한국 재벌들은 이제 2세를 지나 3세 경영으로 넘어가고 있다. 불행히도 경영능력이라는 유전자(DNA)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대에 비해 뒤떨어지는 기업가 정신과 경영능력을 끊임없는 혁신, 대주주와 전문경영인 간 호혜적 파트너십, 사회책임경영을 통한 사회적 지지 획득으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향후 20~30년 안에 3세체제의 재벌 가운데 절반 정도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결코 기우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15년 전 외환위기 당시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지며 30대 재벌의 절반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연초부터 일본의 엔저(엔화가치 하락)로 수출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수출 대기업들이 거둔 막대한 이익의 배경에는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고환율 정책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재벌의 행태가 고쳐지지 않는 한 국민에게 계속된 희생을 요구하기는 힘들다.
이제 재벌이 할 일은 자명하다. 사회책임의 언행일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총수부터 생각을 확 바꿔야 한다. 한화는 재벌 중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 직원 200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비리 혐의로 총수가 재판을 받는 재벌이 아닌 곳에서도 사회책임경영이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불행해지고, 국가와 국민에게 죄를 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