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구조와 언론의 책임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5.15 15: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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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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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에게 고맙다는 절을 수백번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의 방미 기간 내내 전 언론의 지면과 화면을 도배했던 남양유업판 ‘갑을(甲乙) 문제’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윤창중 전 대변인의 방미 수행 중 성추행 혐의 및 도피성 귀국 논란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전 국민의 관심을 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경제적 강자의 약자에 대한 횡포라는 갑을구조의 모순이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위험신호라는 점에서 간과해선 안된다. 이미 봇물처럼 쏟아진 ‘을의 반격’에서 나타나듯 문제를 계속 방치하다간 장차 전면적인 대폭발로 이어질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갑을구조는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의 구현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공정하지 못한 시장경제에서 중소 벤처기업이 꽃피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찾기’가 될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갑을구조 뿌리는 정부의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이다. 정부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과정에서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면서 부품 국산화를 요구했다. 대기업은 이에 따라 국산 부품을 납품할 중소기업을 선정해서 육성했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종속적 관계를 맺는 시발점이 됐다. 일본이나 유럽의 대·중소기업 관계가 독립적이거나 호혜적인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지금도 한국경제는 소수 수출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다.
이들 대기업은 이른바 문어발 확장으로 불리는 사업다각화를 특징으로 한다. 돈되는 일이라면 골목상권까지 침해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결국 대다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대기업과 거래하지 않으면 한국 땅에서는 먹고 살기 힘든 형편이다. 과거 대지주의 땅을 빌리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소작농의 신세와 같다.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대기업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기 쉽다. 반면 중소기업은 불공정행위를 당해도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갑을구조 혁파를 위해서는 1차적으로 대기업 스스로 인식전환을 통해 ‘갑의 탐욕’을 자제하는 게 선결과제다. 한국 대기업들이 실적 지상주의에 메몰돼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얼마 전 롯데백화점의 한 매장 매니저가 “사람들 그만 괴롭히세요”라며 자살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이러다보니 준법·윤리·사회책임 경영은 뒷전이다. 오히려 대기업이 시장경제의 질서를 앞장서서 깨는 게 현실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은 최근 2년 동안 공정위에 적발된 담합건수가 무려 8건(과징금 3500억원)에 달해 반칙왕이라는 오명이 붙었을 정도다.
시장경제의 공정한 심판 역할을 해야할 정부와 사법부의 역할도 미흡하다. 재벌총수가 성역 내지 치외법권으로 여겨져온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 반증이다. 다행이 경제민주화가 국민적 합의를 이루며 전기가 마련됐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관련 첫번째 국정과제가 바로 ‘경제적 약자의 권익보호’다. 하지만 재벌들의 반발, 정치권의 눈치보기,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 논란을 야기한 대통령의 발언 등으로 주요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의 처리가 6월 국회로 미뤄지며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언론이 민주사회의 거울로서 공론의 장 역할을 제대로 못한 책임도 피할 수 없다. 한국 언론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경제권력에 대한 눈치보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국 언론들은 남양유업 같은 ‘작은 갑’에는 강한 것 같지만, 정작 갑을구조의 정점에 있는 ‘슈퍼 갑’(재벌)에는 약하기 이를 데 없다. 언론은 남양유업을 비판하기에 앞서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