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의 진실은

[언론다시보기] 김준현 변호사·민변 언론위원장


   
 
  ▲ 김준현 변호사  
 
갑-을 관계가 언론에서도 화두다. 남양유업 영업직원의 대리점주에 대한 횡포로 촉발된 문제는 우리 경제사회의 본질적인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갑을이란 문구 그대로 계약상 당사자 쌍방을 지칭하는 용어다. 일방이 갑이면 타방은 을이다. 계약은 자치의 원칙이 지배한다. 법은 쌍방의 자유의사에 의해 체결된 계약을 존중하다. 계약법은 이처럼 동등한 당사자, 즉 독립된 경제주체를 예정하고 있다. 개인대 개인이거나 회사대 개인이거나, 회사대 회사이거나 모두 동등한 권리의무의 주체간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이뤄진 계약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는 재산권을 보호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에 따른 현대 민사법의 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은 항상 표면적이고 이상적이다. 민사법은 계약당사자간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주체를 예정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에서 자본력의 차이는 민사법 상 동등한 경제주체라는 전제조건을 한낱 문구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경제주체간 평등과 공정한 거래를 유도하는 경제정책과 법안이 나오게 된다. 민사법 상 경제주체간 평등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에 이를 사회적으로 보완하자는 것이다. 이를 다루는 분야가 경제법이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1980년 제정)이나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1984년제정) 등이다. 이들 법이 유신독재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하에서 제정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자본의 급속한 축적이 진행되면서 경제주체간 자본력의 격차가 극심해진 경제환경이 배경이다. 삼성 현대 등 재벌들이 시장지배력을 강화한 시점과도 맞물린다.

문제는 이런 법률이 제정되고, 이를 담당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족한지 30년이 넘었음에도 갑을관계가 여전히 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법이나 제도만으로는 경제주체간 경제력의 차이를 조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에는 인격이 없다. 경제력 역시 정치권력과 마찬가지로 힘이라는 점에서 같다. 힘이 있다는 것은 타방을 굴복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가진 자는 정치권력도 경제권력도 쉽게 놓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타방을 인정하라고 설득한 들, 그들에겐 마이동풍격이다. 경제민주화 관련 법률이 거론될 때마다 전경련에서 경기침체, 기업활동 위축의 우려를 들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갑으로서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갑을 관계의 본질은 독립된 경제주체 단위간 불공정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생산과 재생산을 반복해야 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제력, 자본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불균등이 근본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나마 지금 갑을 관계가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다행이다. 적어도 환상을 깨뜨렸다.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주체간 거래행위로 물흐르듯이 성장한다는 것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된 경제주체는 모두 평등할 것이라는 믿음, 고용관계에서 벗어나 자영업을 시작한 시민들이 소박하게 가졌던 회사 내부에서의 불평등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굴속의 사람은 일단 동굴을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시장경제의 환상, 아니 환상이라기 보다는 끊임없이 현실을 왜곡했던 장막이 걷히는 중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했던 일들이 눈앞에 벌거벗은 자태 그대로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문제가 드러났으니 이제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남았다. 무엇보다도 경제민주화 관련 법률의 제,개정은 시급한 문제다. 공정거래와 관련된 법률의 재정비에서 핵심은 강력한 규제규정이라고 본다. 힘은 견제하지 않으면 남용의 소지가 있다. 경제권력의 남용은 경제권력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억제가 가능하다. ‘갑’의 횡포는 개인이 행할 수 있지만, 그 제재를 받는 당사자는 경제주체, 즉 기업이어야 실 실효성이 있다. 기업에 대한 제재는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또한 이를 현실화하는 엄격한 집행이 필요하다. 지금도 하도급법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있지만 하청업체가 대기업을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것은 회사 문을 닫을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를 담당하는 공정위에서 엄격한 집행의지를 보이고실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나아가 경제력 집중해소를 위한 중소기업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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