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메 평론가' 황현산 열풍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문화부


   
 
  ▲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  
 
지금 한국 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문인은 문학평론가인 황현산(69)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다.
어떤 소설가처럼 하루키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거나, 어떤 시인처럼 트위터 정치로 논란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조용히 자신만의 문장과 삶의 기품으로 문학하는 후배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인들은 자신의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그의 문장을 인용하며 퍼 나르고 있고, 트렌드에 예민한 패션지와 영화 잡지까지 그의 인터뷰에 열심이다. 그의 생애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는 벌써 4쇄를 찍었다. 요즘같은 세상에서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이 4쇄를 넘긴다는 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황현산 열풍’이라고 하더라도 그리 과장이나 호들갑이 아닐 듯 싶다.

이처럼 젊은 후배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기 평론가지만, 그에게도 약점 아닌 약점이 하나 있다. 칠순이 턱 밑에 다가왔지만, 지금도 ‘등단’에 관한 약력을 써달라고 하면 당황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식 등단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웃으며 자신을 ‘야메 평론가’라고 불렀다.

황 교수는 45세에 데뷔했다. 남들은 ‘중진’ 소리 들을 나이였다. 현 문화예술위원회인 옛 문예진흥원이 펴내는 잡지 ‘문화예술’이 각 언어권별 번역에 관한 글을 청탁했다. 그나마도 그가 처음 생각한 필자는 아니었다고 했다. 한 달을 꼬박 고민해 200자 원고지 100매를 보냈다. 번역론이라고 할 만한 글이 전무하던 시절, 이 주제에 관해 처음으로 읽을만한 글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 다음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에 대한 연구였는데, 지도 교수는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서울대 교수였다. 이 논문은 ‘얼굴 없는 희망’이라는 책으로 출간됐고, 이를 읽은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위원들이 나중에 잊지 않고 황 교수에게 부담스런 청탁을 한다. 김현이 마흔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 대한 추모사를 부탁한 것이다. 그 때 황 교수가 쓴 글이 ‘르네의 바다-불문학자 김현’이다. 하지만 그 때도 소위 바이라인은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아니라, ‘(당시) 강원대 불문과 교수 황현산’이었다. 이후 소설가 김원우가 편집하던 문예지에서 소설가 이청준의 ‘비밀의 문’에 대한 서평을 부탁했고, 이후에는 청탁이 줄을 이었다. 지금이야 자칭 평론가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 때만 해도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신인을 건너 뛴 중진’이 된 심경은 복잡했다. 그는 신인보다 더 신인의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황 교수는 “그 때 긴장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면서 “이 나이에 문단에 나와 허튼소리 하고 있으면, 내 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독백하듯 말했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에 비하면, 먼저 데뷔했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어린 후배들을 모임의 상석에 앉히는 ‘횡액’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 그는 자신의 습작 시를 어렵게 지도교수에게 보인 적이 있다고 했다. 선생은 시 한 편 쓰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고, 그는 일주일도 걸린다고 답했다. 별명이 ‘사무라이’였던 선생은 시간 손실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했고, 대학원생 황현산은 그날로 습작을 멈추고 전공 공부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한 세대 어린 후배가 무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 사무라이 교수님에게 복 있을 진저. ‘대기만성 황현산’의 씨앗은 그 때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작년, 목포 기행을 그와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때 선생의 경쾌한 걸음걸이가 마치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 스텝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젊음, 꾸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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