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문을 한국에 수입한다면

[글로벌 리포트 | 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영국 신문의 지면을 한국에 수입할 수 있다면?”
이 질문에 개인적으로 답을 붙인다면 두 개의 지면은 한국에 가져오고 싶다. 영국 신문의 여론면과 부고면 얘기다. 심지어 무료 신문인 ‘메트로’까지도 한 면씩은 독자 투고에 털 정도로 활성화한 영국 언론의 여론면에 대해서는 이 공간을 통해 한차례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질투 날 정도로 부러운 영국 신문의 부고면 이야기다. 영국 신문을 펼치다 보면 한국 신문과 다른 점으로 가장 확연하게 눈에 띄는 것이 부고면(Obituaries)이다. 이곳의 주요 신문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1면 혹은 2면을 털어서 부고 기사를 싣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에 개봉한 ‘클로저’라는 영화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영화배우 주드 로가 연기한 주인공 ‘댄’의 직업은 다름 아닌 부고 담당 기자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는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에게 회사에서 부고를 담당하는 기자가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신문사가 얼마나 크면 부고 담당기자가 세 명이나 될까.” 그때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과문해서이겠지만 한국의 언론사에서 부고만 담당하는 기자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다. 필자가 아는 한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부고기사는 흔히 사람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뿐이다. 주요 인사가 별세할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담당기자가 기사를 쓰는 것이 관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10월 16일자 신문을 보면 영국 신문들이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 쏟는 정성을 볼 수 있다. 이날 ‘가디언’은 한면을 털어 두 명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한 사람은 50~60년대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등을 주제로 한 공포영화 제작자였고, 다른 사람은 80~90년대 10년 넘게 맨체스터 공항을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같은 날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한면짜리 부고면에는 4명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2차 대전에 동남아에서 활약했던 퇴역 소령, 80년대 런던시의 책임 건축가, 7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최면술사, 그리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20대의 유명 카레이서 등이었다. ‘인디펜던트’는 이날 아예 두면을 털었는데 첫면에는 앞서 소개된 카레이서와 80년대 테헤란 억류 미국인 53명의 구출 작전을 지휘했던 미국 퇴역 장성이 등장했다. 나머지 한면은 모조리 한 명의 인물에 관한 기사로 채워졌는데, 문제의 인물은 ‘세인트 킬다’라는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의 무인 군도에서 살았던 마지막 민간인이었다. 이 군도가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다섯 개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듯 했다. 기사에서는 화제의 인물인 노먼 존 길리스씨가 1930년 8월 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주민 35명과 함께 섬을 떠나온 사연부터 평범한 삶을 살다가 말년에 고향의 홍보대사로 활동한 이력이 자세히 소개됐다.

이쯤되면 영국 언론사의 순발력과 취재력에 놀랄만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흔히 부고기사가 별세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 이틀 사이에 신문에 실리는 것에 견줘, 영국 신문들은 신속성에 대한 강박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실제로 위에서 소개한 8명의 고인 가운데 10월에 사망한 이는 두 명뿐이다. 나머지 4명은 9월에, 심지어 2명은 8월에 별세했다. 영국 신문의 부고 담당 기자들은 고인의 삶을 취재할 시간을 충분히 보장받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신문마다 형식도 다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부고 기사에 바이라인이 붙지 않는다. ‘가디언’은 주로 외부 청탁을 통해서 지면을 채우고 있고, ‘인디펜던트’의 바이라인을 보면 최소한 3명 이상의 기자가 부고 기사를 전문적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꾸준히 부고면을 정성스럽게 꾸민다는 점에서 영국 신문은 공통적이고 인상적이다.

지난해 4월 한국에서는 비전향 장기수 신현칠씨가 사망했다. 그는 전향을 거부한 탓에 1988년까지 2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소설가 박소연은 그의 삶을 일컬어 “폭력과 감금뿐만 아니라, 환대와 영광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존엄함을 보았다”고 적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우리나라 신문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의 사상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굴곡 있는 우리 현대사의 한 거울이었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적을 것이다. 주변에서 소리없이 사그라지는 역사의 증인들에게 우리 언론이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점만큼은 우리가 영국 신문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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