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엊그제 일 같은 데 벌써 1년이 지났다.
시간은 흘러 범인 오원춘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복역중이고, 유족들은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1심 사형구형에서 2심, 대법원을 거치며 무기징역이 확정되자 ‘차라리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피해여성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가 살고 있는 전북의 한 납골당에 안치됐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사건이다. 지난해 4월 한 달간 휴일도 반납하고 후배기자들과 함께 정신없이 취재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은 정확히 지난해 4월1일 밤부터 시작됐다. 범인이 귀가하던 피해여성을 자신의 집으로 납치한 게 밤 10시 20분경이었다. 이후 새벽 5시경 숨진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7시간 가까이 살인마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던 여성이 느낀 공포와 경찰의 구조를 기다리는 절박함은 여성이 112신고를 통해 남긴 7분36초의 통화내용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사건처럼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반응과 파장을 일으킨 사건은 매우 드물다. 경찰에 이처럼 큰 전 국민적인 분노와 비난이 쏟아진 적은, 기자가 기억하기로는 민주화 이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경기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이 연이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의를 표명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언론보도 이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정치권이나 고위공직자가 연결된 권력형 게이트나 대형 금융비리도 아니고, 수십 명이 살해된 연쇄살인사건도 아니었다. 한 여성이 흉악범에 의해 살해된, 어쩌면 자주 있는 단순한 살인사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피해여성이 현장에서 범행을 당하며 112센터와 주고받은 7분 36초의 절박하고 소름끼치는 통화내용과 이를 숨기려는 대한민국 경찰의 거짓말과 사건 축소 은폐 행태가 있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일선에서 지켜야 할 경찰이 사건 축소은폐에만 급급해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명예와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기자는 처음 이 사건을 취재할 때만 해도 사건이면에 숨은 폭발력을 알 수 없었다. 경찰이 112신고를 받고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안타까운 죽음으로 대부분의 기자들이 그렇게 알았다. 4월2일 시체를 엽기적으로 훼손한 흉악범을 잡았다는 내용이 경찰을 통해 알려졌다. 시체훼손 방법 등으로 볼 때 연쇄살인마가 아닌지 취재했지만, 다른 범죄는 확인되지 않았고 대부분 단신처리나 기사화하지 않았다. 사회적의미가 없는 살해 수법이나 시신훼손 상태를 자세히 알리는 것은 오히려 선정적인 보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12신고가 있었고 장소도 구체적으로 말했는데 경찰의 초동수사가 부실해 여성이 숨졌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원중부서 담당간부는 “신고전화는 15초에 불과했고 구체적인 장소도 언급하지 않았다. 신고받고 형사 35명 전원을 출동시켜 밤새 탐문수사를 한 끝에 13시간 만에 범인을 잡았다.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한 수사였다”고 몇 번이고 조리있고 확신에 찬 어조로 해명만 했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깨지기 시작했다. 뭔가 석연치 않으니 떳떳하다면 112신고 내용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경기지방경찰청이 4월5일 내놓은 112신고 통화내역을 보면, 수원중부서 간부가 한 말이 모두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신고시간은 15초가 아닌 1분 20초였고, 특정장소인 ‘지동초등학교 지난 못골놀이터 방향, 집 안’이란 신고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경찰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경찰이 수색했다는 범행현장을 기자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침 수습 중이던 기자 8명이 현장에 투입됐다. 경찰이 탐문했다는 가정집과 상점을 일일이 확인했다. 317곳을 찾아가 137명의 주민을 만나 확인한 결과 경찰이 다녀갔다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이중 상점 4곳만 경찰이 다녀갔다고 확인해줬을 뿐이다. 실제로 탐문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경찰이 탐문했다고 주장했던 상점 한 곳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속속 확인됐다. 경찰의 거짓말을 부각시킨 보도가 1면에 게재됐고, 경찰 수뇌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경기청장이 당일 대국민 사과를 하고 1차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여기서도 진실은 다 밝혀지지 않았다.
경기청 수뇌부조차 사건당일 이뤄진 조치와 112 신고내용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섣부르게 발표를 했던 것이다.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 취재팀에 의해 정확한 112신고 시간이 7분 36초였으며, 그동안 112신고 센터 경찰들은 피해여성의 비명을 듣고만 있었다는 내용이 다시 1면에 게재됐다. 공개됐던 1분 20초 외에 추가 통화내역에서는 범인 오원춘이 청색테이프를 찢어 여성의 손발을 묶는 소리와 ‘잘못했어요. 손가락이 아파요, 제발, 잘못했어요’라고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여성의 절규가 그대로 담겨있었던 것이다. 사건 당일 밤 수원중부서 간부들이 현장출동 조차 하지 않았으며 형사 대부분도 아침이 돼서야 현장에 출동한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수원중부서와 경기청 112신고센터가 당일 이런 내용을 그대로 듣고 있었으면서도 대처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뒤늦게 자신들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일선 서에서 지방청까지 연이은 경찰의 거짓말 행진(15초→1분 20초→7분 36초)은 경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신뢰의 추락을 가져왔다.
이런 경찰의 거짓말 행태가 알려지자 이 사건은 일순간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됐고, 경찰은 국민적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됐다. 피해여성과 유가족의 사연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가족들은 “범행 당일 수색 때 우리는 애타 죽겠는데 심지어 경찰이 현장에서 졸고 있었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피해여성은 범행 4개월 전 부모가 있는 지방에서 올라와 범행현장 부근 언니 집에서 기거하면서 수원 영통에 있는 한 휴대전화부품 조립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고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을 고려해 대학진학 대신 직장을 다니다 자신이 모은 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온, 요즘 보기드문 야무지고 자립심이 강한 20대였다. 매달 받는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부모님 용돈으로 보내드렸고, 함께 사는 조카들은 엄마보다 이모를 더 따를 정도로 자상했다. 일요일인 사건 당일도 밤 10시까지 근무한 뒤 시내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까지 왔지만, 마을버스가 일찍 끊기는 바람에 걸어서 퇴근하다 살인마에게 변을 당한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범인이 잠깐 방을 나간 사이 침착하게 112신고 전화까지 하고 범행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휴대전화를 범인 몰래 숨겨둬 경찰과 연결을 유지한 채 마지막까지 구조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 국민이 ‘경찰이 좀더 잘 대처했더라면 살인마의 손에서 떨고 있을 여성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기자는 당시 사건을 취재하면서 아직도 대한민국 경찰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착찹하기 그지없었다. 기자가 처음 기자생활을 하던 90년대 중반 만해도 경찰은 왠만한 사건은 우선 감췄고, 일부 알려진 사건도 기자들이 먼저 알아내지 않으면 나머지는 숨기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선진화 민주화되면서 국민의식 수준의 향상과 함께 경찰의 수준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이젠 큰 사건의 경우 대부분 공개하고, 경찰이 실수하거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먼저 언론에 알리고 매를 맞을 건 맞는 경우도 많아졌다. 경찰의 인식도 변했지만, 그만큼 무엇을 감추기에는 사회가 너무 투명해졌고, 인터넷과 모바일 정보통신기기의 발달로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됐기 때문이다. 기자는 물론 대다수 국민도 경찰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기에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갈등 시 암묵적으로 경찰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경찰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으면서 오랜 기간 조금씩 쌓아온 이런 공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고위간부부터 일선 형사까지 경찰들은 “어떤 비난과 질타가 쏟아져도 우리는 할 말이 없고 무조건 잘못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경기청의 한 고위 간부는 “통화내역 전체를 밖으로 공개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했고 우리 잘못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컸기 때문에 차마 알릴수가 없었다.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고, 사건초기 신속히 사건의 전 과정을 파악해 모든 잘못을 밝혔어야 했다. 초기 대응 미숙이 사태를 키웠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대한민국 경찰은 민생치안 외에도 정보, 경비, 교통, 수사 등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우선시해야할 일은 역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범죄를 예방하고, 범행이 일어났으면 범인을 잡는 일이 가장 급선무여야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경찰이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를 망각한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던 셈이다.
또 이 사건은 경찰은 물론 우리사회 전체가 치안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경찰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보다, 이번 사건의 이면에는 112신고 때 자동 위치추적조차 안되는 허술하고 구조적인 치안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여기에도 포커스를 맞춰 연일 기획기사를 쏟아냈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의 경찰신고 및 출동 사례를 소개하고, 국내 112 허위신고가 많은데 비해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아 경찰력 낭비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국회 법사위가 대부분 법조출신 인사들로 구성돼 경찰이 최소한 가져야할 112신고 시 위치추적권한도 ‘인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해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도 비판했다. 결국 112신고 시스템과 위치추적, 112 허위신고처벌 강화 등 치안서비스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도록 법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검경 갈등 속에 잠자고 있던 112 위치추적법안이 18대 국회 마지막에 극적으로 통과된 것이다.
112 부실대응의 원인으로 지목된 거짓신고, 장난 전화의 심각성이 확산되면서 경찰 뿐 아니라 일반국민의 인식변화도 가져왔다. 경찰은 허위신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국민도 장난전화에 대해 엄중한 대처를 요구하게 됐다. 경찰이 이 사건 얼마 뒤 안양에서 허위 신고한 20대에 대해 국내 처음으로 1300여만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10월 1심에서 792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경찰은 또 필요할 경우 가택수사를 적극적으로 하고 이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 경찰 개인이 아닌 국가가 배상토록하는 내용의 법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다. 살인 강간 등 긴급 신고가 들어왔을 때 경찰관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 현장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긴급출입권’이 생기는 것이다.
발생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건은 진행형이다. 당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나고 서천호 경기청장이 대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선 경찰과 112신고센터 직원 등 11명이 징계를 받았고 그만두거나 대부분 다른 곳으로 보직 이동했다. 경찰은 뼈를 깍는 반성과 쇄신으로 국민의 경찰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더 두고 볼 일이다. 다시는 수원 20대 여성 같은 피해자가 재발하지 않도록 아직도 미비한 법제도 개선이 이뤄지고 112신고 대응체계 및 현장 경찰들의 근무자세와 인식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 사이에도 잘못된 112신고 대응 및 출동경찰관의 결정적인 실수로 피해자가 위기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경찰만 매도할 일이 아니다. 경찰의 모습은 우리국민 수준의 자화상이고, 우리가 믿어야할 것은 미우나 고우나 경찰이다.
당시 기자는 ‘기자의 눈’을 통해 ‘탐문에 나섰던 경찰들은 신분증을 보여주고 열어달라고 했는데도 안 열어주는데 참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만일 내 집에 한밤중에 형사들이 들이닥쳐 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면 나 역시 쉽게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를 포함해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도 함께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많은 분들이 그 글을 보고 공감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 온 기억이 있다. 지금 기자는, 또 우리국민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사회 모두가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기를 꼭 기원해 본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