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예술에서 생활 예술로

[스페셜리스트 | 문화] 김소영 MBC 주말뉴스부장


   
 
  ▲ 김소영 MBC 주말뉴스부장  
 
전시 기간이 워낙 길어서 넋 놓고 있다가 마지막 주에 이르자 회사에 휴가를 내고 부랴부랴 대구에 내려갔다. 땡땡이 호박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여류 작가 쿠사마 야요이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금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생존 작가 중 한 명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100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소식은 미술계에선 제법 신선한 충격이었다. 입장권은 5000원이었지만 차비까지 감안하면 10만원 가까이 내고 본 가장 비싼 전시. 그러나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고 왔다.

유복하지만 불화한 가정에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성정이 안정되지 않은 친어머니에게 많이 맞고 자랐는데, 어느 날 식탁보의 꽃무늬가 주방 전체로 확산되는 환영을 보게 된다. 평면에서 반복되는 점무늬가 입체적 회화로 전이돼 무한 반복되는 그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강박증과 환각증세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예술 활동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멕시코의 국보급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와 매우 흡사한데 특이하게도 이 두 여성 작가는 어느 특정 예술 사조에 속하지 않는 공통점까지 가지고 있다.

요즘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장에도 체험 공간이 있었다. 아이들이 그의 점(dot) 스티커를 이리저리 붙이거나 그리며 놀고 있었고 부모들은 카메라에 자녀의 모습을 담느라 분주했다. 이 공간은 전시가 진행되는 3개월여 동안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여 완성시키는 작품 ‘소멸의 방(The Obliteration Room)’이라고 하였다. 즉 작가의 작업 개념을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하며 이해할 수 있는 상호 작업인 셈이다. 이것은 10년 전 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예술 작품을 경건하게 모시듯 감상하던 시대에서 함께 즐기며 만들어가는 시대로의 변화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나는 ‘서인국’이라는 다재다능한 스타를 탄생시킨 2009년 엠넷의 ‘슈퍼스타K’가 우리사회에 엘리트 예술 시대에서 생활 예술 시대로의 전환을 알린 변곡점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도 가수가 될 수 있듯이, 나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이 무렵부터 서서히 일어난 것 같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스포츠 분야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유럽에서 엘리트 체육의 최고봉인 올림픽이 예전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은 본인들이 동네 리그에서 공차고 노는 것을 올림픽만큼 중시한다. 바야흐로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 체육으로의 이동이라 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이 이렇게 예술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또 기꺼이 창의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시대에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도 변해야 함은 당연하다. 정부는 예전처럼 ‘나를 따라오시오’식의 목표 지향적인 정책을 내놓을 게 아니라, 국민이 마음껏 문화예술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제가 따라갑니다’식의 일대 정책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생활예술 인프라를 구축한 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가수 싸이가 보여주듯 의미 있는 역사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서 우연히 탄생했던 것이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문화융성 8대 정책과제의 주요 내용을 보니 ▲인문정신의 가치 정립과 확산 ▲전통문화의 생활화와 현대적 접목 ▲문화 참여로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 생활 속 문화 확산 ▲지역문화의 자생력 강화 ▲예술 진흥 선순환 생태계의 형성 ▲문화와 IT기술의 문화융합을 통한 창의 문화산업의 방향성 제시 ▲국내외 문화적 가치 확산 ▲아리랑의 문화 가치 확대를 통한 국민통합 활용이다. 첫 번째 인문정신의 가치 정립은 동물로 치면 뼈대와 같은 것인데, 올바르고 중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머지 항목 가운데선 아무리 생활밀착형 문화를 지향한다지만 여전히 ‘나를 따라오시오’식의 의제 설정이 눈에 띈다. 문화융성을 국정의 기조를 삼은 첫 번째 정부라는 점에서, 문화융성위원회의 8대 정책과제가 탄력적으로 순탄하게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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