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엉뚱한 소통'
[스페셜리스트 | 법조]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사회부 법조팀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11.20 14: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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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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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법원의 최대 화두는 ‘소통’이다. 법원장들의 취임식마다 ‘소통’이라는 문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서울법원종합청사를 비롯해 대법원 등에서 열린 다양한 문화행사 역시 ‘소통’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캠퍼스 열린 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부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찾아가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실제 재판을 진행하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갖는 것 역시 대법원장이 강조하는 ‘소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영 찜찜하다. 과연 법관들이 노래를 부르고, 각종 작품들을 법원 청사 내에 전시하면 사법부의 소통이 이뤄지는 것일까. 몇 백명의 로스쿨 재학생들 앞에서 실제 재판을 진행하고 나면 학생들이 ‘아, 내가 판사님들과 소통을 했구나’라고 느낄까.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해 오해가 없음’이다. 즉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게 소통이다.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양측이 설령 각기 다른 불만을 품더라도 그 판단에 수긍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법부의 소통인 것이다. 이 때문에 청사 내에 작품 몇 점 전시하고, 법관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저 사법부 내부의 행사에 불과할 뿐 소통이라 보기는 어렵다.
올해 초 한창 ‘막말 판사’ 논란을 두고 사법부가 시끄러웠을 당시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막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법부의 구조에 대해 장시간 설명을 한 적이 있다. 당장 오늘 내가 법정에서 처리해야 할 사건은 산더미 같은데 원고·피고 양측 당사자는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 놓고, 변호인은 법률가라면 누구나 수긍해야 할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며 재판을 지연시키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마음수행을 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형사단독재판부의 경우 하루에 처리해야 할 사건 수만 적게는 30~40건, 많게는 50~60건에 달한다. 법정에서 봐야 하는 피고인 수만 최소 30명이 넘는다. 재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각 소송당사자들이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재판이 지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 형사단독판사는 우스갯소리로 “오전 11시30분, 오후 5시가 되면 마음이 너무 초조해진다”고 했다. 하루 중 재판을 해야 할 사건은 정해져 있는데 예정된 시간을 계속 넘기게 되면 ‘빨리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미리 제 시간에 맞춰 온 변호인들이 시계를 쳐다보며 자기차례를 기다릴 때도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사건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때문에 판사들이 여유를 가지고 양쪽 소송당사자의 주장을 차분히 들은 뒤 양측을 설득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피고인이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들어줄 시간’이 없어서 끊어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소통의 장이 돼야 할 법정이 일수 도장찍듯 사건처리에만 여념이 없는 장소로 변한 셈이다. 소통은 판사와 소송 당사자간에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는 진짜 소통의 장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른 채 문화행사에만 급급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대법원은 막말 판사 근절을 위해 ‘법정 모니터링 강화’ ‘교차방청’ 등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향후 지속적인 관찰을 하겠다는 안을 내놓은 바 있다. 법관의 일인당 사건처리건수는 외면한 채 감시시스템만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소통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법관이 자신의 삶이나 재판에서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 이상 소통은 요원하다.
지난 18일 법정을 돌아다니다 한 무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소송당사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변호사에게 “그래도 판사님이 우리 말을 다 들어주시네요”라고 했다. 그러자 변호사는 “그러게요. 그러기도 쉽지 않을텐데”라고 답했다. 여성은 “그래도 고마운 일이네요”라고 했다. 이 여성은 선고결과와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재판부가 들어줬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소통이다. 그러나 정작 사법부는 소통의 진정한 의미는 망각한 채 엉뚱한 곳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