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부끄럽게 만든 청와대 대변인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지난해 2월 박근혜 정부의 첫 대변인으로 윤창중씨가 선임된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KBS 기자 출신이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임명 사실이 발표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민경욱 전 KBS 앵커의 청와대행은 희대의 성폭행 사건으로 물러난 윤창중씨 못지 않은 충격을 언론계에 주고 있다.

‘대변인’ 민경욱은 넉달 전까지 KBS 9시 뉴스의 메인 앵커였다. 이 뉴스는 SBS와 MBC, YTN의 메인 뉴스 시청률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간판 뉴스다. 대한민국 국민의 20% 이상이 매일 저녁 그가 전하는 뉴스를 봤고, 그 뉴스 중 상당수는 박근혜 정부의 공과 과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변인은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대신하여 의견이나 태도를 발표하는 사람이다. 수년간 대한민국 간판 앵커로서 국민은 그에게 국민을 대변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가 국민을 대신해 권력에 쓴소리를 하거나, 국민을 위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대변인 임명을 전후한 논란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는 청와대 임명 발표 직전까지 KBS 문화부장으로 버젓이 편집회의에 참석했고, 그 전날엔 데스크 분석이라며 직접 KBS 뉴스에 출연까지 해서 정부 정책을 보도했다. 오전엔 기자, 오후엔 대변인임 셈이다. 청와대 브리핑실에 기자가 아닌 대변인으로 참석하는 그의 손엔 ‘국민의 소중한 수신료’로 지급됐을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단 하루도 참지 못하고 청와대를 향해 달려갔을까? 잠시라도 지체하다간 그 자리를 또 다른 ‘민경욱’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일까?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그가 KBS에 사표조차 내지 않고 청와대 대변인이 됐다고 비판했다. 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와 정치관련 취재 담당자는 6개월 이내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KBS 윤리강령을 정면으로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KBS 사측은 대변인 임명 전날 사표를 냈고, 임명 당일 면직처리가 됐는데 면직 시점은 대변인 임명 전날이라고 설명했다. 사측의 설명은 참으로 해괴하다. 이 설명에 거짓이 없으려면 KBS에선 사표를 낸 사람이 방송을 출연하고, 편집회의에 참석하며, 면직처리 날짜보다 면직 시점이 앞서는 ‘소급면직’을 하는 회사여야 한다. 이런 회사가 있는가? KBS에서도 이런 사례가 또 있는가?

각종 언론단체는 물론 KBS의 기자들마저 줄지어 비판 성명을 내면서 자신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신임 대변인의 처신은 비겁하다. 며칠만 버티면 올림픽의 열기 속에 논란이 묻힐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표 제출 시점조차 속시원히 해명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정부 정책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

짧은 일주일이었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앵커로서 그의 염치없고, 눈치조차 모르는 행태는 많은 선후배 동료기자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 공영방송 기자, 아니 한국기자 전체에 대한 국민의 비난과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라도 그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거짓없이 밝히고, 사과해야 한다. 정권에 부담을 주는 대변인은 윤창중씨 한명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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