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형 광고’라는 표현이 있다. 기사형식을 차용한 광고다. 하지만 기사는 진실을 알리는 공익을 추구하고 광고는 과장을 통해서라도 상품 판매를 극대화시키는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이 둘을 합친 ‘기사형 광고’라는 표현은 형용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광고보다 효과가 좋다는 이유로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형태로 자리 잡았다.
반면 우리 법은 기사와 광고, 프로그램과 광고를 구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용자인 소비자가 기사와 광고를 혼동함으로써 받게 될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수용자는 기사를 자신이 신뢰하는 언론사가 전문적인 취재력을 이용해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여 전달하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반면 광고는 상품 판매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기 때문에 수용자는 광고가 전달하는 정보 중 과장이나 허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기 마련이다. ‘기사형 광고’는 바로 이런 수용자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한 광고 기법이다.
참여 정부 시기에는 기사형 광고를 원천적으로 금지하지는 못했지만, ‘신문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신문법)’에서 기사형식을 흉내 낸 ‘기사형 광고’가 광고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표시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도록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와서는 이마저 없앴다.
더 심각한 것은 확인이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광고성 기사다. 기자 이름을 내세운 기사이지만 내용은 사실상 광고인 것들이다. 일반 광고는 물론 기사형 광고보다 기사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높으니 이를 악용하려는 광고주들의 압력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환경에 처한 언론사들이 광고성 기사를 수입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클릭 장사’라는 현실이 존재하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언론은 지금 단기적 생존을 위해 장기적으로 스스로의 기반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필패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신뢰를 잃은 언론은 광고를 수주할 흡인력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앞으로 ‘언론사’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언론’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언론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산업의 위기 탓이다.
신문산업의 위기는 이미 오래된 현실이다. 물론 경쟁력을 잃은 산업은 도태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고 신문의 경우에 이 원칙을 그대로 들이댈 수는 없다. 언론을 잃은 민주주의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이 신문이냐 아니냐에 대한 형식 논란은 있을지 모르지만 문자 매체로서 신문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신문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지원 정책을 시행해왔다. 보수 우파인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도 집권 시절 신문산업 지원을 위해 국민대토론을 열기도 했다. 언론다운 언론의 존재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참여정부 시기 신문산업의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신문지원 정책을 정파적이라고 공격하고 거부한 거대 언론들이 좌초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탈출구로 삼은 방송은 해법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을 정파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언론다운 언론을 유지하기 위한’ 바람직한 지원 정책에 대해 사회적 논의조차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시지탄이라지만 지금이라도 ‘신문다운 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사회적 지원에 대해 논의하고 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