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으로 시작된 이른바 비선정국 파동을 지켜보며 달리 주목하는 건 언론, 특히 주류 보수언론들이 내보이는 공격성이다. 보수 성향의 주류 언론들은 통상 정치권력의 중심부에서 내놓는 시그널에 주파수를 맞추며 사회의 의제를 설정하고 여론을 정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해 왔다. 그것이 수구라는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고 현실과 미래를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통상’이지 ‘항상’은 아니다. 보수 언론이라 해서 언제나 보수집권 세력의 바람과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집권 세력과 상호교감을 유지하며 뻔한 보도와 의도된 논조를 유지하던 언론이 갑자기 야성(野性)을 발휘하며 사나워질 때가 있다. 권력 핵심부가 붕괴되어 갈 때, 부인할 수 없는 권력자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권력 내부 투쟁에서 통치자가 방향을 못 잡고 헤맬 때…. 언론은 그동안의 암묵적인 협력자에서 사납고 굶주린 적으로 돌변해 달려들게 마련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6·29 선언 이후가 그랬고, 김영삼 정권 때는 소위 황태자가 추락하며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김대중 정권 때는 아들들의 구속사건 이후로 노벨상과 남북정상회담의 약발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노무현 정권 때는 집권여당의 분열이 언론의 야성에 불을 당겼다. 그러니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선 뒤 보여 준 언론의 한결같은 무기력함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해 버린 지금의 맹폭스러움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권력이 상처를 입었을 때 언론이 野性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것은 동서고금 언론의 본성인 셈이다.
그러나 평가는 아직 이르다. 권력에 달려들어 어디를 공격하고 어느 정도 공격한 뒤 물러서는가도 마저 지켜봐야 한다. 지금 일부 언론의 보도행태에서는 소원해진 권력과의 거리를 이번 기회에 좁히려고 권력의 핵심부는 덜 다치도록 배려하며 주변을 맴돌거나 이후의 입지를 위해 특정 세력을 대변하며 반대쪽을 공격하는 듯한 부적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언론은 오늘 이전과 오늘 이후를 놓고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쉽게 취재해 편히 보도하던 관행적 보도는 경제적이다. 하지만 이는 저널리즘과 미디어가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축소시켜왔다. 언론사들은 효율성을 위해 어뷰징과 브리핑 받아쓰기, 남의 기사 베껴 쓰기, 대중 밀착을 핑계로 한 연성기사를 관행으로 정착시켰지만 그 효율성은 언론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장기적으로 언론의 토대를 허물어뜨려 왔다.
여기서 탈출하려고 궁리해 낸 것들이 정권과 금권을 향한 비즈니스와 마케팅, 예산절감, 구조조정이지만 그것이 언론을 살리는 길은 아니다. 우리는 언론의 취재보도가 관행에 의해 무기력하게 이뤄지며 보도 내용이 거기서 거기이던 시절과 언론들이 성역의 벽을 넘어 좌충우돌하며 사나워진 이후 저널리즘의 영향력과 미디어 시장의 크기가 얼마나 달라졌나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길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국민은 이번 사태에서 우리 사회의 연이은 재난과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관리시스템의 부재가 정치적이고 구조적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언론이 성역을 넘어 소신껏 취재보도에 임할 때, 그런 노력이 다수 언론사에 의해 동시에 이뤄질 때, 우리 사회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가능성을 갖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우리 언론은 국민을 또 다시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지금의 맹렬함이 또 다른 형태의 기회주의적 행위가 아니고 진정한 저널리즘으로의 복귀임을 국민에게 증명하고 우리 스스로의 성찰과 거듭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