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과연 사슴을 사슴이라 불렀나

[언론다시보기]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

대학교수들은 12월에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는데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선정됐다. 착잡했다.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사슴이라 부르지 않거나, 또는 사슴이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인데 올해 한국 정치가 그러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4월 세월호 참사나 11월 ‘비선 실세 국정논란’ 의혹 문건에서 밝혀져야 할 수많은 진실이 ‘법치주의’라는 명분으로 또는 ‘대통령의 발언’에 눌려 가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12월 둘째 주부터 3주 연속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했다.


진나라 시황제를 모신 환관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태자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황제로 내세웠다. 조고가 어느 날 호해 앞에 사슴을 가져다 놓고 말이라고 했는데, 어린 호해조차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지록위마)”고 지적했다. 조고가 두려운 신하들은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않고 “말이다”라고 했다. 일부 뜻있는 신하들이 “사슴이다”라고 진실을 밝혔지만, 조고는 그 대답을 한 사람들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조고의 천하였다. 


사기의 ‘지록위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훈이 딸려 있다. ‘지록위마형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정부의 실정으로 민생고에 시달리던 진나라 백성들이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나중에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군대가 수도인 함양성을 점령했다. 환관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다시 킹메이커 노릇을 했지만, 자신이 옹립한 자영의 손에 죽고만다. 조고가 죽었지만 진나라는 때를 놓쳤다. 자영은 항우가 함양성을 공략할 때 죽고,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는 16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부린 사람의 처참한 최후뿐 아니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나라는 나라가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사람들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실의 일부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의혹을 품어왔다. 대통령이 여론과 동떨어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장관들에게 대면보고를 받지 않고 소통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지난 11월 말 세계일보에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문서를 입수해 ‘비선실세 의혹’을 제기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국정농단의 의혹을 파헤쳐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지록위마형 인사들을 청산하고 새롭게 ‘100% 대한민국’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보수언론들조차 가세해 검찰이 이번에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청와대발 문서’에 의하면 언론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기춘대원군’으로 호명하며 청와대 실세로 거론했지만 핫바지에 불과했다. 언론들은 지난 1년여 넘게 헛다리를 집은 셈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그 청와대 문건을 ‘찌라시’라고 부르고, ‘찌라시에 국정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며 내용의 진위 여부보다 유출경위 조사에 무게를 두면서 진실을 깨내는 작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현재 청와대 문건을 첫 보도한 세계일보 기자는 기소될 위기에 처했다.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의 저자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는 3차 개정판에서 “문서야 말로 가장 강력한 진실의 증거”라고 했는데, 한국의 언론 현실은 그와 다르다. 


“저널리즘! 이것이 언론인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부디 잃어버린 저널리즘을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 경위는 유서를 썼다. 최 경위는 지난 12월 청와대공직기강비서관실 문서를 유출한 혐의 조사 중에 자살했다. 최 경위는 ‘저널리즘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언론은 헌법 21조의 표현의 자유와 헌법 19조의 양심의 자유, 양심의 자유로부터 파생된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생각해본다. 대통령의 손가락 끝만 쫓지 말고 그 손가락 너머 존재할 지도 모를 ‘진실의 달’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