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도하고 무엇을 킬(kill)할 것인가

[언론다시보기]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한 인물을 흔히 박계동 민주당 의원으로 기억한다. 박 전 의원이 1995년 10월 19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차명으로 300억원을 예치하고 있다’면서 예금잔고조회 문서를 흔들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탓이다.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의 폭로의 시작은 ‘상도동계 맏형’ 격인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이었다.


서 전 장관은 1995년 8월1일 정치부 기자 대여섯 명과 저녁 술자리를 했다. 서 전 장관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내걸고 “두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이 대리인을 통해 4000억원대 가·차명 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출처 조사를 피하게 해주면 2000억원을 국가에 내겠다고 했다”고 취중 발언을 했다. 조선일보가 재빠르게 2일자 1면에 대서특필했다. 그 발언을 듣고도 그날 밤 보도하지 않았던 언론사들은 난리였다.


서 전 장관은 3일 즉시 발언을 부인했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7일 수사에 착수했고 6일 만인 12일 “슬롯머신 자금이 둔갑한 것”이라고 거짓된 발표를 했다. 박 전 의원이 두 달 뒤 국회에서 문서를 흔든 단초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 이라는 비밀이 해제된 것이다. 여기서 물어보자 서 전 장관과 정치부 기자들의 저녁 술자리는 사석인가. 비보도를 걸었던 만큼 보도하면 취재·보도 윤리를 어긴 것인가. 기사는 킬(kill) 했어야 하는가. 
 

지난 주말부터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삐뚤어진 언론관이 폭로된 KBS의 ‘녹취록 보도’가 논란을 빚고 있다. 첫째는 ‘사적인 자리의 사적 발언’이라는 논란이다. 두 번째는 ‘보도과정에서 언론 윤리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 총리 후보자는 지난 1월27일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뻗치기’를 하던 한국일보 등 4개 언론사의 정치부 기자 4명과 ‘번개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총리 후보자는 후보자 지명 이후 언론사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 관한 의혹제기를 막았다고 발언했다. 또 언론사 인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녹취록의 발언은 상당히 원색적이다. “(언론사 간부) OOO하고 △△△한테 ‘저 패널부터 막아 임마. 빨리 시간없어.’ 했더니만 지금 메모 즉시 넣었다고 그래 가지고 빼고 그러더라고. 내가 보니까 빼더라고.” 거나, “(중략) ‘어이 국장, 걔 안돼’ ‘야, 김 부장 걔 안돼’, ‘지 죽는 것도 몰아요.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라고 발언했다. 이 총리 후보자는 “좀 흠이 있더라도 덮어주시고, 오늘 이 김치찌개를 계기로 해서 도와주소”라고도 했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총리 후보자와 기자들의 번개 오찬이 사적인 자리인가. 기자들은 취재원이 밥과 술을 사주기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 취재원이 많은 기삿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난다. 초선 정치인조차 알고 있다. 즉 두 직군에서 ‘사적인 만남’의 교집합을 찾아낸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사금파리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니 사적인 대화나 모임이라는 지적은 관련 보도를 폄훼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서 전 장관 사례처럼 비보도를 전제한 발언조차 국민의 알권리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면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오래된 관행이다. 다만 녹취를 취재원에게 허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취재 윤리와 관행으로 문제 삼을만 하다. 


보도 윤리의 심각한 훼손은 다른 데 있다. ‘김치찌개 번개’에 참석하지 못한 언론들이 궁금해 하는 대목이다. 이 후보의 삐뚤어진 언론관을 KBS가 보도하고 ‘한국일보와 나머지 3개사에서 왜 보도하지 않았는가’ 이다.


한국일보의 10일자 1면에 따르면 모두 녹취한 것으로 돼있다. 정보보고를 받은 후 데스크들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해 보도하지 않은 것인지, 이 총리 등극 후를 기약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총리 후보자가 주장하는 바 비리의혹 보도를 빼준 언론사들이 있다니 ‘합리적인 의심’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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