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종합편성채널 뉴스시사 프로그램이 ‘안산 인질 살해범 피의자가 과거 대구 친딸 성폭행범과 동일인이라는 오보를 내 중징계를 받을 것’이라 한다. 눈길을 끈 것은 보도제작팀장의 의견 진술. “당시 방송된 내용을 나중에 확인해보니 오보였다. 당일 다수의 인터넷 매체 기사를 검색해 인용 보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오보였다. 매일 방송을 제작하고 취재할 수 있는 기자가 따로 없다 보니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작가가 경찰서에 통화하는 수준이다.”
또 민주언론시민연합과 ‘한겨레 21’이 종편 4사의 시사토크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한 결과 출연자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주장의 객관성과 근거가 불충분하고, 의도적인 종북몰이도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위의 두 사건은 오늘 우리 언론계의 단면을 압축해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언론은 수익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과 사주에게 넘어가 있다. 그런 소유구조와 종속된 저널리즘 상황에서 뉴스를 맡은 조직은 보도 인력을 줄이고, 더 가볍고 손쉽게 저렴한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런 저렴한 뉴스와 과장된 시사성 오락물에 시청자들은 익숙해지며 동조되어 간다.
저널리즘에서 ‘진실’이라는 가치에 대해 고민한 시작이 언제부터라고 못 박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장 먼저 심정적으로나마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 중 하나가 월터 리프먼으로 알려져 있다. 리프먼은 “뉴스와 진실이 일치하는 경우는 야구 스코어와 선거 개표 결과뿐일 것”이라고 탄식처럼 뱉어냈다. 1920년대 초반의 일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헨리 루이스 맹켄(H.L.Menken)이라는 언론학자가 리프먼이 이렇게 말하기 몇 년 전에 ‘신문윤리(Newspaper Morals)’라는 저술에서 언급한 지적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 일이다. 이 지적을 리프먼이 재인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도 물론 리프먼에게 ‘그 책에서 읽었던 것이냐’고 확인한 것은 아니다. 톰 골드스타인의 저술 ‘언론과 진실, 이상한 동거(Journalism and Truth, Strange bedfellows)’에는 그렇게 기록돼 있다.
리프먼이 그렇게 이야기한 걸로 알려져 있다고 적으면 다 알아 들을 것을 이렇게 굳이 ‘년도’까지 써가며 장황히 사족을 다는 이유를 살펴주셨으면 한다.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는 누가 말한 내용인지,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거의 100년이 지난 2015년에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도 추적확인이 가능하도록 배경설명과 주석을 달아 객관성을 담보하려 애쓰고 있다. 이것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고, 그 책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상의 원칙으로 수행한 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노력은 지금도 연구실과 교실에서 또는 법정에서 그 분야의 지식인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언론, 아니 평론가 작가는 빼고 적어도 기자만큼은 당연히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객관성과 공정성의 추구에서 가장 뒤처진 분야가 저널리즘이라면 너무 자괴적일까?
21세기 접어들어 이 나라의 저널리즘은 진실에 접근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기껏 여기서 말하면 저기서 한마디 더 들어 첨부시키는 균형감각마저도 위태롭다. 누군가 이야기한 것을 똑바로 전달하는 인용마저도 불안하다. 그리고 그런 저널리즘의 영역을 이제는 정체불명의 평론가, 그리고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떼어주고 있다. 정통 저널리즘이 추구해 온 엄격성과 책임성이란 가치는 여기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저널리스트라고 스스로를 불러온 우리 앞에 저널리즘의 그 다음은 무엇이 될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