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와 언론 그리고 모호성의 상관관계

[언론 다시보기]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애초에 안철수 의원은 언론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무릎팍 도사 출연으로 성공한 중소기업 오너에서 대단히 참신한 유명인으로 발돋움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세속적인 CEO와는 전혀 다른, 심지어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한 청렴하고 사심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언론은 그의 이런 면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필자 역시 언론을 통해 형성된 그의 이미지에 매료됐다. 언론의 속성상 과장된 면이 있으리라 추측은 했으나 전반적인 그의 모습은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특히 그가 박원순 현 서울시장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을 때 약간의 미심쩍음까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이미지는 존재하나 구체성이 결여된 것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새정치’가 그랬다. 하지만 그게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의 모호성을 ‘언론’이 경쟁적으로 채워줬기 때문이다.


당연히 언론의 해석은 중구난방이었다. 전반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긴 했지만 해석의 범주가 너무 넓다 보니 실체는 더욱 모호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일례로 언론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그를 이해한 사람들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경험을 조금씩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지지율은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모호성’과 ‘언론의 중구난방 해석’은 그의 지지율을 떠받치는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2012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바랐던 야권 지지자들의 묵인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으로 그는 그런 언론을 이용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언론이 알아서 다양한 해석을 해 줄테니 자신은 원론적인 입장을 유지하면, 서로 다른 취향의 유권자들이 상호 충돌 없이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통합민주당과 합당을 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탄생시킬 때만해도 이러한 전략은 유효했다.


문제는 그가 당대표가 돼서 제1 야당의 구체적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 되면서부터였다. 한 개인으로서는 그나마 유효한 전략일지 모르나 매순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대표는 모호성에 기댈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다시 모호성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예전과 달리 ‘구체성’을 장착했다. 하지만 그러자 사람들은 경악하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던 안철수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인 안철수에 대해 형성된 이미지와의 괴리감이 더 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문득 황우석 박사가 떠올랐다. 근본적인 책임이야 당연히 그에게 있겠지만 그를 애초에 엄청난 사람으로 만들어줬던 건 언론이었다. 더불어 유전공학이란 전문지식은 사람들에게 ‘모호성’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니 한명의 인물과 언론과 모호성이란 삼박자는 당시에도 작동한 메카니즘이었다.


물론 안철수 의원이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황우석 박사와 똑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건 ‘언론’이다. 더불어 나를 포함해 언론계에 발을 딛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반성할 겨를도 없이 언론은 반기문 총장 이야기를, 그의 ‘모호성’을 도화지 삼아 연일 채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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