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협회장의 특정기사 보도 요구는 의견제기가 아니라 압력이었고, 명백한 편집권 침해이다.” 17일 KBS 보도국 국·부장단이 낸 성명서 한 대목이다. 이병도 KBS 기자협회장이 전날 아침 편집회의에서 “세월호 청문회 마지막 날인 만큼 9시 뉴스에 보도를 하는 게 좋겠다”라는 발언을 비판하면서다. 정치권 등 외부 세력의 부당한 보도 개입도 아니고 평기자 대표의 제안을 ‘압력’으로 몰아붙이는 국·부장단의 어이없는 행태는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기자들이 좋은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 데스크에 제안하고 요구하고 심할 때는 얼굴을 붉히고 싸우기까지 하는 것은 기자사회의 일상이다. 특히 KBS의 경우 평기자 대표인 기자협회장이 편집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KBS 편성규약에 명시돼 있다. 이런 까닭에 기자협회장은 지난 16일 보도국 아침 편집회의에서 세월호 청문회를 9시 뉴스에 보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도 국·부장단은 “기자협회장이 특정 아이템에 대해 관여한 것은 명백한 편집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지난 14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세월호 청문회는 국민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첫 공개 활동이었다. 참사 1년이 넘었지만 ‘국가는 왜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뉴스가치에 대한 평가, 즉 세월호 청문회를 9시 뉴스에서 보도할 지 여부는 국·부장단이 결정하는 사안이지만 다른 목소리가 있다면 경청하는 게 언론사 간부들의 기본 자세다. 더욱이 9시 뉴스가 세월호 청문회 첫날 소식을 ‘간추린 단신’으로 전한 것에 대해 KBS 안팎에서 비판이 있었던 터다.
하지만 보도국 국·부장단은 기자협회장의 제안을 “특정 아이템을 넣고 빼라는 식의 요구”라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참석한 편집회의에서 평기자인 기자협회장이 얼마나 강경발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기자협회장의 제안이 타당하지 않으면 그냥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자협회장의 요구를 편집회의 참석자들 모두가 부담스런 압력으로 인식했다”고 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어떻게 평기자가 국·부장단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으로 국·부장단이 기자협회장에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부당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기자협회장의 의견 개진을 국·부장단이 집단 성명서로 대응한 것은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편집권 침해’ 운운하는 이례적인 집단 성명서는 고대영 신임 사장이 인사청문회와 취임사 등을 통해 현행 편성규약을 부정한 발언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KBS 편성규약은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2001년 KBS 사장과 노동조합, 기자협회 등이 합의해 만든 제도로 방송법에 근거하고 있는데, 고대영 사장은 영국 BBC 제작 가이드라인을 끌어들여 취재 및 제작에 대한 데스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편성규약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KBS 기자들은 사내게시판에 국·부장단의 성명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잇달아 올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부장단 성명에 이름을 올린 임장원 경인방송센터장이 22일 “서명에 참여한 것이 부끄럽다”는 사과글을 올렸다. 그는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지향한다면 기자협회장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겨주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KBS에 제2의 임장원은 없는가. 편집권은 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KBS 저널리즘을 지키기 위한 자산이지, 보도국 간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부 구성원들을 겁박하기 위해 함부로 내던지는 엄포용 수사는 더더욱 아니다. 국·부장단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