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르쳐주는 영화’라는 ‘암살’을 지난해 7월에 보지 못했다. 독립된 나라를 찾겠다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에 세운 김구나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킨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한국에서 독립운동 소재 영화가 제대로 됐겠나 하는 편견이 작용한 탓도 있다. 2015년 ‘광복 70년’인 한국은 어느덧 “(일제 강점기에)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았다”며 일제 때 고위직을 지낸 사실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다 무심코 신년 연휴에 ‘암살’을 보았다.
영화 ‘암살’에서 식민지의 삶은 이랬다. 일본군 대위가 자신의 구두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의 가슴에 권총을 쏘았다. 일제에 작위를 받은 부친이 부끄러워 살인청부업자 ‘하와이피스톨’된 젊은이도 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열혈청년은 공포에 질려 변절했다. 그 염석진은 김구의 신임을 얻어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이 됐지만, 동료를 팔아 조선총독부의 경찰대장까지 올랐지만 1949년에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나!”라고 절규했다. 조선인 사업가 강인국은 어떤가. “가족을 위해 민족을 위해, 백성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이렇게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출세에 장애가 되면 피를 나눈 딸도 총살했다. 고향을 떠나 만주로 도피한 조선인들은 “만주의 집 벽이 무너지고 지붕에서 물이 새도 우리는 수리를 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라고 했다.
영화 ‘암살’은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이나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 폭탄 전문가 황덕삼으로 상징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보여줬다. 안옥윤의 청춘이 일본 유학파 미치코의 청춘과 다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와이피스톨을 돌보는 영감은 “야! 3천불! 우리 잊지마~”라고 당부했지만, 우리는 ‘먹고사니즘’을 핑계로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도, 일제의 잔혹한 악행도 대충 다 잊은 듯하다. ‘경제를 살리자’는 정부의 달콤한 속삭임과 위협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저버렸다. 반대 시위가 극심했던 1965년 한일협정도 사실 ‘경제’가 키워드였다. 당시 어설픈 합의로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의 배상문제가 사장됐다가 1991년에서야 어젠다로 떠올랐으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2가지의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고, 둘째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였다. 그런데 지난달 28일의 한일 외무장관 위안부 타결은 이 두 가지 원칙과 무관했다. 정부가 뒤통수를 쳤다고 국민이 판단할만하다. 여기에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합의’까지 덧붙여졌다. 한심한 사실은 일본 외무상은 합의이후 내내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이 옮겨질 것”이라거나 “일본군 위안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보류할 것”이라고 발언하는데, 한국 정부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응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비밀주의로 일관하다보니 한일 위안부 타결 전후로 주요한 뉴스는 일본 언론발 국제기사로 들어왔고, 한국 언론은 받아쓰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번 합의를 폐기하라는 시국선언과 ‘소녀상을 지키자’는 시민운동을 잠재우려면 정부는 “소녀상을 이전하지 않는다”라고 공식 발언하면 된다. 더불어 국민은 이번 한일 합의를 ‘100억원에 소녀상을 치우자’로 이해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이 반영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이 어렵다. 영화 ‘암살’을 본 1000만명의 한국 관객들은 더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 “16년 전,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라는 영화의 ‘응징’ 코드보다, 더 강렬한 것은 끝내 생존해 그 시대를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실현이나 권선징악이 영화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어야 건강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