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다음은

[언론 다시보기] 김준현 변호사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세계 최장기록을 세웠다. 유례없는 정치적 경험을 하고 있는 시민들의 관심도 뜨겁다. 그런데 대부분 언론은 이에 인색하다. 테러방지법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정부와 여당의 시각에서 야당의 몽니나 국회의원선거 사전운동의 일환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어떤 나라에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이라는 박 대통령의 격분이나,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여당의 불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한 지상파 앵커는 “우리 국회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세계의 눈들이 과연 지금 우리 국회를 어떻게 바라볼지도 의문입니다”는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반응은 이와 다르다. 무제한 토론에 나선 야당 국회의원들의 발언을 통해 정부와 여당, 언론이 그동안 말하지 않은 사실을 접하고 있다. 정치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하던 시민들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국회에서 제정되는 법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습득하는 기회가 된다.


통신비밀보호법 상 영장없는 감청범위의 확대나 금융거래정보 수집권한을 국정원에 부여하는 것 등의 독소조항으로 인한 인권침해의 위험성을 좀 더 현실감있게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테러방지라는 명목으로 국정원이 공룡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에도 공감을 표시한다. 더욱이 국정원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댓글작업이나 증거조작을 통한 간첩조작 사건 등 공작정치의 전력이 있지 않은가.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예전의 장외투쟁이 주는 효과와 차별성이 있다. 거리에서 시민들과 접하는 장외투쟁은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시민들과의 접촉면의 확대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의사당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지만 생방송을 통해 24시간 중계되고 있다. 장외투쟁보다 파급력이 크다.


SNS나 정보통신망을 통한 의견과 자료제공 등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활발히 이뤄진다. 발언에 나선 의원들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견을 의사당에서 전하고 있다. 선거 때 표만 던졌던 시민들도 달리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의견이 실제로 국회의원을 통해 정치현실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권자로서의 자부심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런 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효과는 상당하다.


물론 필리버스터는 끝이 예정되어 있는 저항수단이다. 더 이상 발언자가 없거나 발언이 이어지더라도 국회 회기가 끝나면 필리버스터는 종료된다. 국회법에 따라 차기 회기에서 표결절차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테러방지법 상정이 철회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다수당인 여당의 원안대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필리버스터는 의사진행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방안에 불과하지 악법 제정을 막는 결정적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무용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끝이 있다는 한계를 알고 있는 지금이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지난 2009년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때를 상기해보자. 지금의 종합편성채널을 탄생시킨 미디어법 역시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날치기 통과됐다. 야당이 권한쟁의 심판을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의 심의 표결권한은 침해했지만 법안 통과는 유효’하다는 모순된 결정을 내린바 있다. 이번 테러방지법 역시 비슷한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추진하는 쉬운 해고를 위한 노동관련법 등도 줄줄이 대기중인 상황이다.


필리버스터에 시민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마 새로운 정치참여의 수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한 시민사회의 정치적 각성은 일시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더 많은 의견이 소통될 때 진정하게 꽃을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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