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이후 언론의 과제

[언론 다시보기]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총선이 끝났다. 결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난무한다. 언론들은 출구조사 결과나 총선 참여와 득표 결과에 대한 선관위 자료에 근거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선거 결과에 드러난 민심을 읽는 것은 왜곡된 정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민심에 대한 정치공학적 판단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가 무엇이며 20대 국회 또는 정치권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점이다.


총선 이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협치를 강조했다. 협치는 분명 민주주의 제도에서 바람직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접하는 마음이 그리 개운치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몇 개월만 되돌아 봐도 권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협상, 테러방지법 제정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이때 우리 언론들은 얼마나 협치의 필요성을 주장했을까?


총선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된 지금도 여전히 국회가 반성하라는 말만 되뇌는 대통령을 보면 얼핏 협치의 강조가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 협치에 대한 강조가 여전히 권력을 가진 대통령보다는 야권에 하는 주문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일보는 대통령에게 소통하라고 하면서도 아예 대놓고 야당에게 무조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여당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합리적 리모델링을 하라고 주문한다.


조선일보 역시 대통령이 당청관계를 수평적 구조로 바꾸고, 야당도 논의에 참여시키라는 주장을 하지만 야당에게 국회권력을 장악했다고 정부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면 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협치를 ‘협박’했다.


협치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명확하다. 설득하거나 협상하려 하지 않았던 대통령과 다수 여당에게 그 책임이 있었음은 총선이 결과로서 보여줬다. 그런데도 협치가 필요했던 시점에는 침묵하다 정국이 변하자 외려 야당에게 협치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하는 언론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총선 당시에도 지속됐던 정치공학적 보도 태도에 대한 잔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언론의 모습을 고려할 때 총선 결과에 대해서도 정당들에 대한 유불리만을 따지거나 특정한 권력의 이해득실을 중심으로 민의를 재해석하고 내용 없는 정치적 주문만 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언론은 제 정치세력의 판도만 따지는 소위 경마중계식 보도를 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권자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이에 대한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에 기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선거 보도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선거 결과 분석에만 매달리지 말고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점검하고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쟁점에 대한 다양한 세력들의 논리를 전달하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지점과 정치권을 이끌어 실천 가능한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공개장이라고 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장덕진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7~8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부양률(‘일하는 사람들’이 부양해야 할 ‘일 안하는 사람’의 비율)로 본 사회구조의 변화가 급속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도 곧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불평등이 이미 충분히 심화되어 지금도 고통 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소외된 집단의 고통에 공감하는 언론, 언론인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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