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MBC와 YTN, 그리고 공영언론 정상화

[언론 다시보기]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기억은 잊힌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발발이 됐던 PD 수첩 PD들에 대한 법정시비가 최근 판결이 났지만 여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다. 당사자인 조능희 PD가 판결 관련하여 중앙일보 모 기자의 왜곡 기사에 대해 피를 토하는 성토를 페이스북에 올린 걸 봤다. 스크롤을 내리자 얼마 안돼 광장에서 쫓겨나는 MBC 기자와 관련한 내용에 달린 엄청난 수의 좋아요가 보인다.


MBC 구성원들은 사측의 왜곡보도를 규탄하기 위해 4년 만에 MBC 사옥 앞에 모였다. 4년만이라는 의미는 2012년 파업 이후를 의미한다. 170일 동안 무노 무임으로 싸웠던 시간이었고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바로 그 파업이다. 허나 여기에도 이제까지 뭐 했냐는 식의 비아냥이 댓글로 달린다. 너무 늦지 않았냐는 애정어린 성토라고 보기엔 말끝이 날카롭다.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명은 이미 권성민 PD가 오늘의 유머에 자세하게 밝힌 바 있다. 바른 말을 하는 MBC 구성원들에 대한 징계와 비제작 부서로의 인사발령이 횡행하고, 그들의 빈 자리엔 사측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신규 인력을 채용해 메웠다는 게 설명의 골자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싸워 봤자 재징계와 또 다른 인사발령의 연속이고 MBC 뉴스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 해직 후 복직이 되었지만, 징계와 부당한 인사발령을 또 다시 받고 결국 스스로 사퇴한 이상호 기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무엇보다 이 정도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권성민 PD는 해직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게 현재의 MBC다. 물론 안다. MBC 구성원들의 마음과 일반 시민들의 마음이 다르다는 걸 말이다. 더구나 JTBC가 사실상 2008년 당시 MBC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상황 아닌가? MBC, 나아가 공영언론의 정상화에 대한 열망 보다 그동안 엉망으로 보도한 것에 대한 성토가 사람들의 마음에 더 클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영언론의 정상화를 공영언론 종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공영언론은 말 그대로 공공의 자산이다. 해당 언론에 대한 통제도 공적인 영역에 의거한다. 좋든 싫든 ‘국민의 방송’이란 의미다. 반면 종편은 사주가 있는 사적 언론이다. TV조선의 최근 돌발적 행보에서 보듯 단 한 명 사주의 결심으로 논조가 백팔십도 바뀔 수 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시민들에게 유리해 보여도, 어느 다른 순간이 되면 정 반대의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JTBC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JTBC의 콘텐츠와 뉴스는 충분히 훌륭하지만 그게 공영언론처럼 공적인 영역에서 통제되어지는 건 아니다. 사주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엄연한 사기업이다.


국민이 통제하는 방송이 도대체 왜 이 꼴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방송을 사실상 ‘정권의 방송’으로 만드는 사장 선임제도 등을 개선해야 한다. 정치권 특히 대통령이 사실상 결정하는 공영언론 사장 선임 제도를 아쉽게도 민주정부 10년간 개선해내지 못했다. 반성할 일이고 성토당해 마땅한 일이지만, 방치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제라도 그들이 다시 일어서겠다면 거기에 응원을 보내고 힘을 보태는 게 공영언론의 실질적 주인인 국민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다.


그와 별개로 드는 생각도 있다. 2008년 YTN 투쟁부터 2012년 MBC 170일 파업까지 그 과정을 그들 스스로 찍은 영상을 거의 빼먹지 않고 다 봤다. 보면서 많이 놀랐다. 막연히 알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나 처절하게 탄압을 당했고, 그럼에도 너무나 간절하게 포기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이다. 그 때 많은 촛불들이 그들 뒤에서 ‘마봉춘’과 ‘윤택남’을 외쳤다. 응원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 사라졌지만, 그들은 그 응원이 명령한 것을 붙잡고 아직도 공정언론을 외치며 견디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 잊혀졌기로서니, 그들을 잊고 과연 우리는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MBC와 YTN 그리고 공영언론에 대해 부디 애정어린 비판을 당부 드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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