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계란판'이 되는가

[언론 다시보기] 변상욱 CBS 대기자

변상욱 CBS 대기자. 최근 언론계에서 ‘계란판’이 화제가 됐다. 계란판(종이난좌)은 신문지로 만든다. 폐지가 아니라 윤전기에서 인쇄를 막 끝낸 신문이 밀봉된 채로 옮겨져 ‘계란판’이 된다. 지구촌 어디에서건 마찬가지다. 신문들의 콘텐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내용은 더 세련되고, 글은 더 리드미컬하고, 사진과 그래픽도 나날이 발전했다. 다만 세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시청률 최고의 방송들이면 방송사의 온라인 사이트 역시 최상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잠깐의 기대는 정말 순진했다.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이 대단한 수준의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편집해 내보낼 테니 기다렸다 보라’는 식의 방송은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볼 건지 편성표를 짜는 건 이용자들이고 방송사가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시대다. 또 그동안 신문은 ‘지면’을 팔았고 방송은 ‘시간’을 팔았다. 그러나 광고주들은 ‘시간을 달라’, ‘지면을 달라’ 하지 않는다. 사람들, 물건을 소비할 사람들을 내놓으라 한다. 이런 저널리즘과 편성, 마케팅의 변화 앞에서 망연자실만 하거나 회피하려 한다면 곧 ‘계란판 방송’의 때도 올 것이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또 다른 계란판’이다. 저널리즘이 이용자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블록처리되고 ‘또 다른 계란판’으로 짓이겨지는 이유는 ‘신뢰의 상실’이다. 최근의 예로 ‘올해 100억원 이상 투입한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했는데 주 52시간제 도입 때문’이란 기사가 있다. 대형 영화제작이 피자 굽는 공정과 같지 않다면 올해 나온 대작은 주 52시간 근무 논의가 있기도 전에 얼추 제작을 마쳤을 거다. 이건 또 다른 ‘신사동 간장게장 골목 썰렁’ 기사인 셈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시골판사’가 된 전 대법관을 찾아갔으나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대법관 출신 시골판사 善意마저 짓밟은 反법치 행패” “시위대에 밀려 넘어진 박 판사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고, 취임식도 취소가 불가피했다”는 디테일한 묘사는 무얼까? ‘북한이 방북 취재비 1만 달러를 요구했다’, ‘풍계리 갱도 폭파는 가짜다’, ‘연막탄을 피운 흔적이 있더라’…. 오보도 왜곡도 아닌 의도된 날조 뉴스는 소위 주류 언론에 즐비하다. 이용자는 ‘뉴스를 읽어야 하고, 기다렸다 해당 팩트체크를 다시 찾아 읽어야 한다.’ 미친 짓이다. 아예 뉴스를 읽지 않으면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심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찝찝한 기분으로부터도 자유다. ‘또 다른 계란판’으로 던져 버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불행하게도 신문과 달리 방송은 계란판으로 재활용조차 못한다.


굳이 위로거리를 찾자면 덕분에 좋은 일도 생겼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저널리즘은 ‘뉴스에 관한 뉴스’, ‘가짜를 파헤치는 진짜’라는 새로운 영역을 얻어냈다. 어쩌면 우리는 ‘몰락’과 ‘소생’이 엇갈리는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껏 창조력도, 시대적응력도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정직’하지도 못했다면 이제라도 구태를 버려야 한다. 그것을 일러주는 게 ‘계란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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