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팀 심석희 선수의 용기로 시작된 체육계 ‘미투’ 고발 열기가 뜨겁다. 심 선수가 고등학생 때부터 상습 성폭행당했다는 보도는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무려 6000건 가까이 쏟아졌다. 이 중 대다수가 심석희 선수의 이름을 제목에 넣었다. 아예 ‘심석희 사건’이라는 문구도 등장했다. 한국 언론의 성폭력 보도 수준이 어느 정도로 낮은지를 보여준 일이다.
혹시 아직도 왜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니 설명한다. 심 선수는 피해자다. 가해자는 조재범 코치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유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건은 ‘심석희 사건’으로 둔갑했다.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심 선수인 것처럼 바뀐 것이다.
한 번이라도 클릭을 더 받고, 하나의 ‘좋아요’라도 더 얻기 위해 기본적 인권 보도 준칙을 저버린 처사가 아닌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감수성 수준이 바닥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어렵게 용기를 낸 심 선수에게 2차로 피해를 입혔다. 본인의 선수 경력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용기를 낸 심 선수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줬다.
보도 내용도 문제다. 심 선수에 이어 전직 유도 선수 신유용씨가 고교 시절 코치에게 상습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고발하면서 일부 언론은 피해자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공개했다. 본인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신씨의 사적인 사진을 아무런 공익적 목적 없이 공개한 것이다. 추후 삭제했지만 신씨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
핑계는 다양할 수 있다. 약 6000건에 달하는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주목을 받기 위해 1초라도 빨리 써야 했고, 조금이라도 주목도가 높은 제목을 붙여야 했다는 항변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는 기자의 숙명이자 기본이다. 기자로서의 당연한 책임을 두고, “업무 강도가 높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댄다면 기자가 될 기본 자격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희망의 싹은 보인다. 1년 전 ‘미투’ 사태 보도 당시와 비교해보면 이번 조재범 사건을 두고는 언론계에서 먼저 자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조재범 사건’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경향신문과 MBC 등이 대표적 사례다. 여당에서도 해당 사건을 논하면서 심 선수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선수’라고만 언급했다. 같은 당 의원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심석희법’이라는 잘못된 표현을 ‘운동선수 보호법’이라고 정정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언론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다. 환영한다.
갈 길은 아직 멀다. 하지만 답은 가까이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가 지난해 함께 펴낸 성폭력ㆍ성희롱 사건 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이다. 각 언론사에도 무료로 배포된 이 책자는 얇지만 성폭력ㆍ성희롱 사건의 정의부터 법률적 지식, 보도 준칙까지 상세한 내용의 핵심을 잘 담아냈다. 현장에서도 온라인으로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다. (관련 홈페이지 바로가기)
언론에 대한 신뢰가 낮은 시대다. 언론 스스로를 돌아보는 노력이 중요한 때다. 이번 체육계 미투 사태를 계기로 성폭력 피해자 보도 관행도 바로 잡아야 한다. 기사를 1초 빨리 올리는 것보다, 클릭수 10회 늘리는 것보다, 피해자의 인권이 중하다. 일단 뜨겁게 취재하되, 펜은 냉정히 놀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