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삼성 미래전략실 소속 사장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연간 영업이익 50조원 중에서 10조원 정도를 협력업체의 경쟁력 강화에 지원하면 어떻겠느냐고 질문했다. 이익이 40조원으로 줄어도 여전히 재무적 성과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고, 대신 협력업체를 쥐어짠다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고, 협력업체의 혁신역량이 강화되면 삼성전자의 경쟁력도 높아져 시장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지않겠느냐는 취지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비웃음이었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과도한 ‘일본 의존’이 화두다. 더불어 ‘대기업 책임론’이 제기된다. 박영선 중기부장관은 “대기업이 그동안 중소기업 제품 구매를 외면하다가 위기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도 “8년 전 중소기업이 (일본이 수출규제를 한 반도체용) 불화수소 제조기술을 개발했지만, 대기업이 시간이 걸린다고 쓰지 않았다가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며 반성을 촉구했다. 국책연구소의 박사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거래로 중소기업의 이윤 축적이 안 되고, 고급인력 확보도 어렵다보니 연구개발은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삼성전자가 진작에 막대한 영업이익 중에서 일부라도 협력업체 지원에 사용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정부는 ‘탈일본’을 위한 핵심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대책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길게는 50년 동안 해결을 못한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리 없다. 무엇보다 기술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품질과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잘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핵심 부품·소재·장비 개발로 새 성장동력이 확보된다. 대기업은 안정적인 공급선 확보는 물론 핵심 부품·소재·장비 발전에 따른 경쟁력 강화도 기대된다. 국가적으로는 투자와 고용 확대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런 ‘1석3조’의 효과를 거두려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이 관건이다. 일본이 소재·부품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비결도 기업 간 협력이 꼽힌다. 홍남기 부총리가 대-중소기업 간 협력 강화 방안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최고경영자(대기업 총수)의 결단이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SK는 일본 수출 규제로 직격탄을 맞았다. 마침 최태원 SK 회장은 사회책임경영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기업은 사회적 가치 창출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해야 한다.” 핵심 소재·부품의 ‘탈일본’, 중소기업 살리기, 고용 확대는 한국사회의 최우선 과제다. 궁극적으로 SK를 살리는 길이다.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 경영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대-중소기업 상생경영에 앞장서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