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언론인 김진배씨(86)는 매주 화요일 전북 부안군으로 향한다. 서울에서 버스로 꼬박 3시간. 고령에 귀도 어둡지만 지난 1월부터 한 주도 거르지 않은 일이다. 그가 이 여정에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취재하고 기사쓰기 위해서다.
그는 지역 주간지 ‘부안독립신문’에 연중기획 인터뷰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연재하고 있다. 인터뷰이 선정부터 섭외, 취재, 사진촬영, 기사작성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1959년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 동아일보를 거쳐 1975년, 1980년 두 번의 해직 끝에 언론계를 떠났지만 돌고 돌아 다시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부안은 고향이자 그 자신이 1981년 11대, 1992년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역구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또 한 번 펜을 꺼내든 건 기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에 참여했던 주민들이 2004년 창간한 부안독립신문을 뒤늦게 접한 것이 계기였다.
“어느 날 신문을 봤는데 뻘떡뻘떡해요. 아주 날이 서 있고. 지자체며 기업이며 노조며 그렇게 자유롭게 비판하는 신문을 본 일이 없어요. 호기심이 생겨 발행인을 찾아갔지요. 어떻게 운영하냐니까 단 한 부도 공짜로 나가는 게 없대요. 세상에 이런 신문이 있나! 이 사람들이 어떤 힘으로 신문을 만드는지 안에 들어가서 보고 싶어졌지.”
그런 그가 먼저 기사쓰고 싶다고 제안했다. 신문 측에서도 흔쾌히 응했다. 단 대가는 없고 한쪽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는 지역의 얼굴을 조명하는 인터뷰 기사를 준비했다. 부안 출신이거나, 고향은 다르지만 부안에 살고 있거나, 다른 데서 나고 자랐더라도 부안을 위해 일 한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다. 지난 1월14일 <김진배가 만난 사람> 첫 회로 부안 농민운동 1세대 박배진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후 교육자, 의학자, 여성농민운동가, 향토문화 개척자, 독립운동가와 그 자손들, 사진작가, 문인화가 등 “지역의 대단한 사람들”을 다룬 28편이 나왔다.
그는 인터뷰를 연재하면서 벌써 8달째 서울과 부안을 오가고 있다. 화요일마다 3시간씩 고속버스타고 부안에 내려가 인터뷰하고, 목요일이면 서울로 돌아와 기사를 마감하는 식이다. 보청기를 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터라 취재엔 늘 그의 아내가 동행한다. 매번 10만원 이상 드는 취재 경비는 전부 두 사람 주머니에서 나간다. 이 일 때문에 부안에서 머무는 작은 방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아내 장정숙씨(72)는 “자기 돈 들여 이렇게까지 하는 남편을 보면 참 대단하다”며 “매주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남편이 내색 안 하고 열심히 하니 저도 힘내서 끝까지 도와주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내의 걱정과 달리 “전혀 힘들지 않다”고 손을 저었다. 오히려 이 나이에도 자유롭게 취재하고 기사 쓸 수 있어 하루하루 즐겁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주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았고, 엄혹한 시절 해직을 두 번이나 당하고 언론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도 “감옥에 끌려가 골병들게 두드려 맞은 일이 없었던 것”만으로도 나라, 사회, 지역에서 받은 게 많은 삶이라고 스스로를 평했다. “나라와 사회에 이 빚을 갚는 길은 너무나 멀고 아득하지요. 다행히 지역에선 아직 할 수 있는 역할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지.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알리고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연대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호기심과 빚진 마음으로 시작한 일에서 그는 이제야 사람을 배우게 됐다고 털어놨다. 폼 잡고 큰소리치며 살았던 지난 기자시절을 떠올리면 괜히 머쓱해진다. “민주사회를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면서 깊게 알아가게 된 거지. 개개인이 다 다르구나, 그걸 인생 말년에서야 체감하게 된 거야. 허허 참.”
그를 만난 날은 지난 12일 월요일이었다. 다음날 또 부안에서 취재가 예정돼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내일은 어떤 분 만나세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 “그건 말 안 해요. 기자가 아직 취재도 안 했는데 이야기할 수 있나. 다음 주 기사로 직접 보셔야지.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