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에 관대한 사회

[스페셜리스트 | 문화] 장일호 시사IN 기자

장일호 시사IN 기자. 75기가짜리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에는 ‘여자애들’이라는 폴더가 있었다. 도서관 한층은 거뜬히 채울 수 있는 용량이었다. 밝혀진 것만 30건이 넘는 연쇄 강간범의 집에서 압수한 전자기기였다. 폴더 안에는 앰버·세라·릴리처럼 각각 이름이 붙어 있었다. 추가 피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이었지만 정작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직 뚫는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트루크립트’라는 소프트웨어로 암호화 돼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팀은 플리바게닝(유죄협상)을 시도한다. HDD 암호를 주면 강간 외 혐의는 묻지 않겠다고 했다. 범인은 거절한다. 수사팀은 “강간범 새끼한테 무슨 선택권이 있느냐”라며 분노하지만 ‘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327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범인은 수사팀 앞에서 태연하게 말한다. “범죄도 하면 할수록 늘어요. 처음에는 경찰이 집에 찾아와 끌고 갈 게 뻔하다고 확신했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이래도 되는구나, 훌륭해. 당신들이 늘 한 템포 느린 게 문제예요. 일이 터지고 나서야 반응하죠.”


2008년 미국 워싱턴주를 시작으로 벌어진 연쇄 강간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마지막회 내용이다. 드라마는 성폭력 수사가 얼마나 잘못된 편견과 관행으로 점철돼 있는지를 고발한다. 같은 사건을 다룬 책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반비, 2019)의 저자인 <프로퍼블리카>의 수석 기자 켄 암스트롱은 2016년 관련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작품은 수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언론인도 꼭 봐야 할 콘텐츠로 우선순위에 꼽을 만하다.


드라마도 책도 인상적인 대목이 여럿 있었지만, ‘디지털 증거’를 두고 다투는 드라마의 마지막 화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최근 32개국 공조수사로 2년 만에 드러난 이른바 ‘손 아무개 사건’과 겹쳐서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탓이다. 손씨는 우회로를 써야만 접속할 수 있는 다크웹에서 회원 128만 명을 대상으로 유·아동 성학대 영상 22만 여건을 유통해 왔다.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공소장에 따르면 이는 단순 포르노가 아닌 성범죄 영상 증거물이다. 적발된 310명 중 223명이 한국인이었다.


범죄자는 기술을 앞세워 사회 시스템을 조롱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사나 취재는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형법이 최후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도 맞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제대로’만 기능한다면 예방 효과 역시 충분하다는 것 역시 우리는 이미 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손씨가 국내에서 받은 1년6개월의 형벌은 충분한가.


포퓰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혹형주의는 주의해야 하지만, 특정 분야 범죄가 다른 국가에 비교해 현저하게 낮은 처벌을 받고 있다면 되돌아봐야 한다. 한국 사회가 성범죄를 얼마나 관대하게 여기는지, 또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를 ‘손 아무개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