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 아이는 없고, 없을 예정이며, 고양이 한 마리를 같이 키운다. 5년 전 내가 먼저 ‘결혼하자’라고 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다시 생각해봐.” 나는 그 대답이 좋았다. 결혼을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해보고 아니면 그만둘 수 있는 인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되도록 실패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그 실패가 각자의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혼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식 겸손’의 속내가 궁금했다. 행복하면 안 된다는 약속이라도 다같이 한 걸까. 하나같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결혼하면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 관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우리가 사는 모양을 통해 결혼이 삶의 과정임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협업’이 언제나 쉬웠던 건 아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인 동시에 두 사람만의 일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인 나에게 그랬다. 누가 시킨 것도, 짝꿍이 원한 것도 아닌데 내게 마치 숙제처럼 주어지는 ‘역할’을 인지할 때마다 불편하거나 놀라곤 했다. ‘나’는 사라지고 역할만 남는 자리에서 나는 세상이 말하는 ‘나쁜년’이 되기를 선택하곤 했다. 어떤 관계에는 수많은 맥락이 있음을, 그래서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서 쉽게 ‘불행’으로 요약해버리기도 한다는 걸 나는 지난 5년간 알게 됐다.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는 그 불행을 두 글자로 요약하는 대신 137분간 공들여 보여준다. 결혼에서 이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난제들로 겹쳐 있는지 들춰내며 쌓아가는 이야기들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수많은 영화에서 결혼과 이혼을 왜 이벤트 혹은 결말로 ‘처리하고’ 마는지를 <결혼 이야기>는 차라리 폭로한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우리는 모두 휘청인다. <결혼 이야기> 속 니콜과 찰리처럼.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전’ 남편의 덥수룩한 머리가 신경 쓰여 잘라줄 수 있고, 그가 즐기던 음식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척척 시켜주기도 하면서. 아이가 있는 두 사람은 때로 소리 지른다. “널 평생 동안 알고 지내야 한다니!”라고 절규한다.
한때 부부였던 니콜과 찰리는 이제 더 이상 같은 방향으로 걷지 않는다. 다만 신발끈 정도는 묶어줄 수 있는 관계로 남았다. 시작이 그러했듯, 끝도 둘의 몫이다. 나는 니콜과 찰리가 대문을 ‘함께’ 닫았던 장면을 곱씹었다. 나와 짝꿍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오랫동안, 언젠가 어느 날의 잘 헤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함께 잘 사는 방법도 아주 멀리 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의 역사를 대하는 윤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혼 이야기>는 압도적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