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병사 70명당 위안부 1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는 일본 공문서 기록이 최근 추가로 확인됐다. 지난 6일 일본 교도통신이 주중 일본 영사관의 기밀문서를 보도하며 나온 내용이었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모집과 관리에 직접 관여했음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여서 국내 다수 매체들이 이를 집중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에선 사뭇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다. 역사 수정주의를 내세운 아베 정부가 등장한 이후 일본에선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에 일체의 반성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득세하고 있다. 위안부와 관련해 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가 무력화되고, 일본군이 머리채 끌듯 강제로 끌고 간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며 일본에 법적 책임이 없다는 ‘프레임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려는 여러 움직임에 대한 공격도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를 향한 공격이다. 1991년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음을 한국 언론보다 앞서 보도했던 우에무라 기자는 이 기사를 포함한 2건의 기사로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지난 2014년엔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우에무라 기자를 전임교수로 선발한 고베 쇼인여자학원대학을 협박해 그의 취업을 무산시키고, 딸의 사진까지 인터넷에 올려 온갖 비방을 하기도 했다.
우에무라 기자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본격적인 싸움에 나섰다.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라는 책을 발간해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부당한 공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한편 그를 비방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엔 그의 투쟁과 노력이 언론의 자유를 지켜내려는 노력이라며 제7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기자협회보는 시상식이 있던 지난 4일 우에무라 기자를 만났다.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기까지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7살이던 1976년 봄,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미술 전시에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마음을 빼앗긴 게 시작이었죠. 이후 와세다대 재학 시절 묵었던 하숙집 ‘우애학사’에서 재일한국인 선배와 만나며 다시금 한국에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와세다 부근의 고서점에서 <고바우 영감>과 만난 것도 그 무렵이고, 우애학사 강의실에서 한국어 공부모임을 갖기도 했습니다. 1982년 3월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아사히신문 기자가 됐는데, 운 좋게 어학연수생으로 선발돼 1987년엔 서울에 유학도 갔습니다. 1989년 가을 도쿄에서 오사카 사회부로 이동이 결정됐을 땐 재일한국인·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시 이쿠노쿠 거리에 살았고요. 그 거리에 살던 한국인들과 그들에 대한 차별을 ‘이웃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18번 연재했습니다. 자연스레 한국의 민주화나 인권 문제도 내 취재 범위라 생각했고, 이따금 서울에 출장을 가 서울 지국에서 원고를 썼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만나게 된 것도 그 즈음입니다. 나는 우선 피해자의 말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1990년 위안부를 찾는 일은 허탕으로 끝났고, 1991년에서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기사로 쓸 수 있었습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녹음을 확보해 위안부 문제를 최초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3일 후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 무렵 타 일본 언론들도 관련 문제를 보도했는데 유독 우에무라 기자만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요.
“우선 내가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것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전쟁 중에는 협력했지만, 전후 이를 반성하고 아시아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또 제 아내가 한국인이라는 영향도 컸죠. 아내의 어머니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이사인 양순임씨입니다. 내가 유족회의 뜻을 받아 위안부 기사를 썼다고 우익들이 말하기 쉬웠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보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터 취재를 했고, 애당초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먼저 전달한 쪽은 유족회가 아니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였습니다.”
-2014년에 공격이 본격화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2012년 9월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 수정을 표명하고 산케이신문 등에서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2014년 1월에는 산케이가 표지 에 <고노 담화 한일 양국에서 합작>이라는 기사를 씁니다. 이러한 고노 담화 비판과 관련해, 제 기사가 고노 담화의 바탕이 됐다는 허구가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우에무라 때리기의 도화선이 된 주간문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수록합니다. ‘이를 계기로 아사히는 위안부 문제를 잇달아 다루기 시작해 (중략) 이에 한국 여론이 격분하자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중략)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 일본 정부가 강제연행을 인정했다는 인상을 세계에 줬으며, 오늘까지 일본이 까닭 없는 비판을 계속해 받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즉 우에무라가 강제연행 기사를 아사히에 보도했고 이에 한국 여론이 격양돼 고노 담화가 나왔다는 논법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현재 도쿄와 삿포로 두 곳에서 명예훼손 재판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심은 모두 패소했다고 들었는데요.
“두 법원 모두 ‘내가 의도적으로 기사를 날조했다는 주장은 명예훼손으로 볼 수 있지만 피고 측 주장에 공익의 목적이 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이전의 판례들과 비교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죠. 아마 우리가 너무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왜냐면 삿포로에서 상대하고 있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여성은 일본 개헌 단체 대표로 아베 정부의 개헌을 지지하고 추진하는 사람입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친구이기도 하죠. 그런 사람과 싸우니 쉽지 않습니다. 이제 곧 고등법원 판결이 나옵니다. 삿포로가 내년 2월6일, 도쿄는 오는 16일에 결심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증거를 찾아서 다음 판결은 좋게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만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심하지 않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1991년 보도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거리를 뒀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거리를 둔 직접적인 원인은 1993년 테헤란 특파원이 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아사히신문만 해도 다수의 기자가 위안부 문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위안부 관련 기사를 또 쓰면 유족회의 의붓아들이 썼다고 공격 받을 수 있었기에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론·법정 투쟁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주시하려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겁주려는 세력이 오늘의 일본에 있습니다. 곧 법정 투쟁이 끝납니다. 이후엔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것을 꼼꼼하게 좇는 르포 기사를 쓰려고 합니다.”
-2017년 가을부터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일한 학생포럼’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혐한 감정이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증오 연설 증가 등 일본 내에 배외주의가 급속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에서도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고요. 그것이 우에무라 때리기의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 풍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내 눈으로 이웃을 보고, 이웃에 친구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습니다. 일한 언론인 지망생들끼리 교류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언론인들의 자원 봉사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포럼은 일본과 한국에서 연간 1~2회 개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포럼은 2017년 11월 서울에서 열렸고 두 번째는 원폭의 날에 맞춰 지난해 8월 히로시마에서, 세 번째는 미군기지 건설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오키나와에서 개최했습니다. 올해 5월엔 한국의 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 광주와 서울을 찾았습니다. 내년 초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기도 했던 규슈를 방문합니다.”
-한일 언론인들이 연대할 수 있을까요.
“한일 언론이 연대하면 동북아에 평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양국의 언론인들이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우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모색해가야 하겠지요. 지금처럼 반일·반한 감정을 부각시키는 보도가 아니라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사실관계를 잘 보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기자들도 서로 더욱 교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한국의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일본의 매스컴문화정보노조회의가 일본 주간 잡지의 혐한 특집 기사를 비판하며 한 데 뭉친 것처럼 양국 기자들이 서로 많이 재회했으면 합니다. 술을 함께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요. 비단 젊은 기자뿐만 아니라 나이든 기자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서로 1년만 공부하면 한국말, 일본말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에무라 기자를 응원하는 한국인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여러분의 지원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우에무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역사 수정주의자와의 투쟁입니다. 질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