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았다. 100년 역사에 공도, 과도 많겠지만 언론자유를 선언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기자들을 집단 해고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다. 50여년 전 적지 않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길거리로 내몰렸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언론사도, 국가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기자협회보는 지난주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에 이어 이번 주엔 최병선 조선투위 위원의 인터뷰를 싣는다.
최병선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위원이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72년은 암울한 해였다. 이전에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대해선 직간접적인 탄압과 보복 조치가 취해졌지만 그 해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후 유신헌법이 통과, 공포되자 정권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봉쇄됐다. 13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우수한 동료 기자들과 자유롭게 사회 문제를 논했던 최병선 위원도 당시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회상했다.
“유신 이후 어떤 것이 옳은지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어요. 유신을 비롯해 박정희와 관련된 내용 일체가 보도될 수 없었습니다. 기사를 받아쓰면서 ‘여기서 뭐하는 거냐. 기자로서 의미가 없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어요. 신문기자로서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진다는 생각,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기자들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도 그런 차원에서 굉장히 활성화됐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은 교묘했다. 특히 1973년 3월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광고 탄압은 그 효과가 컸다. 3월4일 <선거 뒤에 쏟아진 법률>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조선일보가 주민세와 전화세 등 각종 세 부담이 늘어난 것을 비판하자 중앙정보부는 과거 6개월 동안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은 기업 명단을 작성하고, 이 중 5회 이상 광고를 실은 기업체를 대상으로 광고 조정을 실시했다. 기업체 대표들을 불러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조선일보에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동의’도 받아냈다. 조선일보는 곧 그 압력에 굴복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대학가의 집회와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커지면서 경향신문 기자들이 1973년 10월19일 ‘외부압력 배제’ ‘사실보도 충실’ 등을 결의하자 조선일보 기자들도 11월27일 뒤따라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공표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1974년 10월24일 밤엔 조선일보 기자 150여명도 편집국에서 모임을 열고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배제한다 △언론인의 보도활동과 관련해 부당하게 연행·구금당할 경우 귀사할 때까지 철야농성을 한다 △학생·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표시는 반드시 게재한다는 3개 항을 결의하고 이를 지면에 실었다.
조직화된 기자들은 매일 신문을 모니터하는 한편 유신정권의 입장에서 쓰인 기사들에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1974년 12월18일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가 해임됐다. 두 기자가 12월13일자 4면에 유신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외부 기고가 게재된 것에 문제를 제기하자, 편집권 침해라며 해임한 것이다.
“두 분이 워낙 열혈파셨어요. 외부 기고를 보고는 못 참고 편집국장에게 ‘이건 틀리지 않느냐’며 말 그대로 하극상을 벌였던 거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해직은 기자들의 행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습니다. 정치부, 경제부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기자들이 합심해 해고 철회와 공정보도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어요. 기자 중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조선일보는 3개월 안에 해고된 기자들을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는 1975년 3월6일 임시 긴급총회를 열고 편집국장단의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 측은 제작거부가 계속될 경우 전원 파면하겠다고 위협했다. 3월7일엔 정태기 분회장을 포함한 기자협회 집행부 5명을 파면했다. 총무부장이었던 최병선 위원도 이날 해고됐다. 30살이 채 안 되는 젊은 기자였던 그는 만 3년을 채우고 그렇게 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엔 해고의 연속이었다. 1기 집행부가 해고된 직후 조선일보 기자들이 즉시 2선 지도부를 구성해 농성을 이어가자 조선일보는 이들도 파면했다. 편집국 부·차장 중 최초로 이종구 정치부 차장이 농성에 합류하자 그를 포함한 4명을 추가 해임하고 37명을 무더기로 무기 정직시켰다. 3월11일엔 편집국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들을 회사 밖으로 강제로 몰아냈다. 그렇게 쫓겨난 33명의 조선일보 기자들은 3월21일 조선투위를 결성했다.
“이후엔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의 나날이었습니다. 언론이라는 게 상당히 민감한 문제니 기자들을 당장 잡아가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태기 선배나 신홍범 선배가 옥살이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신 선배 같은 경우엔 도저히 먹고 살기가 힘들어 낙향한 충북 진천에서도 가택연금 비슷하게 형사들 감시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투위 소식지 원고를 받으러 서울에 있는 천관우 선생님 댁에 갔는데 나오는 길에 형사들이 자신을 붙잡더랍니다. 알고 보니 감시하다 놓쳐서 수소문 끝에 찾아온 거예요.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는 물음에 대답도 않고 지프차에 자신을 태우고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집에 데려다줬답니다.(웃음)”
최 위원 역시 해직 이후 생계유지가 되지 않아 어려운 나날들을 보냈다. 주위 도움을 받아 번역 사무실에서 일해보기도 했지만 “살림에 보탤 수 없는 수준”의 급여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1년 후 투위 기자들은 각자 생업을 찾기로 했다. 최 위원은 현대건설을 시작으로 여러 회사에 조금씩 적을 두다 80년대 초 지인의 소개로 두산그룹 계열의 광고 대행업체인 오리콤에 입사했다. 이후 이사까지 역임하며 광고업계에 오래 몸담았다.
“사실 광고업계에 있으면서 재미는 없었습니다. 광고는 광고주의 의견이 제1순위라 개인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됐거든요. 올바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일 하는 게 싫었지만 어떡합니까. 살아야 하는데. 저뿐만 아니라 해직 이후 어려웠던 건 모든 사람들이 똑같았어요. 김유원 선배가 특히 생각나는데 생활이 어려우니 낮에는 용산시장에서 고추를 팔고 밤에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셨어요. 생활력이 아주 강한 분이었는데 지금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최병진이라는 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와 또래였는데 참 올바르고 양심적인 분이었죠. 그런데 현실이 괴로우니 술을 많이 먹고 결국 간이 문제가 돼 일찍 돌아가셨어요. 사실 돌아가신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는데...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당시 해직된 조선일보 기자들 역시 지금까지 회사에게도, 국가에게도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13명의 조선투위 위원이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김대중 정권 때인가 노무현 정권 때인가 약간 보상을 받았습니다. 액수가 2000~3000만원 정도 됐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공식적인 사과는 일체 없었습니다. 해고에 대해 뭔가 마무리를 하려면 당연히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공식적인 활동이 없었던 조선투위가 최근 활발히 나서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동아투위는 굉장히 올바르게 싸워왔지만 우린 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자 특성상 사회 정의에 민감했고 그것이 시대 흐름과 맞물려 일회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앞날이 달라졌던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사람, 그나마 약간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시대 상황에 갇혀 어려워진 거죠. 그럼에도 조선일보 100주년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최악의 보도 100선을 만들며 엉망으로 무너진 조선일보를 보면서 더 확신하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 조선일보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 확신으로 앞으로도 계속 언론 운동을 할 겁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