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 10월7일 경향신문사 앞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기다리던 석간신문이 나오자 그는 시장을 내달렸다. 이날 경향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로 실린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높이가 1.6m밖에 안 돼 허리도 펼 수 없는 두 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 15명을 몰아넣고 종일 일을 시켜 폐결핵, 위장병까지 앓는 소녀들, 저임금도 휴일도 모른 채 일하지만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 기본 권리도 박탈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이 기사는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2011년 11월9일자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로 잘 알려진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경향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전태일에게 엄청난 기쁨과 희망을 줬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바이라인을 붙이지 않는 관행 탓에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2011년 기자협회보 취재 결과 기사 작성자는 그때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을 출입하던 경향신문 사회부 고 기남도 기자로 확인됐다.
기 기자의 후임으로 노동청을 출입했던 김명수 전 신아일보 회장은 기자협회보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긴급조치로 인해 노동, 학원문제는 안보문제로 취급해 보도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남도 선배가 기사화를 강력하게 주장해 데스크가 수용, 보도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편집국 간부들은 기사화에 난색을 표했지만 사회부를 중심으로 한 평기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해 사회면 톱으로 빛을 봤다고 한다.
보도 당일 전태일과 동료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300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신문사측에 담보로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느낀 기쁨과 희망은 오래가지 못 했다. 기자협회보는 “보도 이후 실태조사를 약속했던 노동청은 태도를 바꾸고 이들을 압박했다”며 “결국 전태일 열사는 11월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긴 채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했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