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뉴스9>, 첫 여성 메인앵커 발탁’
지난해 11월 KBS가 냈던 보도자료 제목이다. 당시 KBS는 17년차 기자인 이소정 앵커를 9시 뉴스 메인앵커로 발탁했다면서 이를 ‘뉴스 혁신의 첫걸음’이라고 설명했다. 본보를 포함한 많은 언론도 ‘40대’ ‘여기자’를 지상파 뉴스 메인앵커로 발탁한 ‘과감한’ 선택과 변화를 주목했다. 그로부터 1년. 떠들썩했던 만큼, KBS 뉴스는 정말 달라졌을까. 단지 앵커의 성별만 바뀐 것은 아니었을까. ‘최초’라는 타이틀의 무게는 좀 덜어졌을까. 이소정 앵커를 만난 지난 25일은 ‘뉴스9’를 진행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여의도 KBS 신관 3층 회의실로 들어서는 그에게 먼저 소감부터 물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숨 가쁜 1년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직도 어리바리하고, 매일 헤매고 있습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이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어제의 멘붕을 잊게 해줄 건 오늘의 멘붕 밖에 없을지도’라고. 1년이라고 하니 벌써? 싶다가도 아직도 이러고 있다니, 하는 자괴감도 들어요.”
“본부장에게 앵커 제안받고 ‘이 양반이 미쳤나’ 생각”
보도본부장에게 처음 앵커 제안을 받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짧은 몇 초 사이에 영화 필름이 촤라락 지나가듯 별생각이 다 들었다. ‘어떡하지? 할 수 있을까? 나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이 양반이 미쳤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여기서 예스를 안 하면 또 언제 하지? 여기자 후배들은?’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오케이를 한 게 1년 전이다. 본부장에게는 “감사한 마음 반, 원망하는 마음 반”이다.
이 앵커는 2003년 KBS에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탐사제작부, 통일외교부 등을 거쳤다. KBS 2TV ‘아침뉴스타임’과 1TV ‘미디어비평’ 등 풍부한 진행 경험도 갖췄다. 뉴스 특보에도 자주 차출돼 차분하면서도 순발력 있는 진행 능력을 인정받았다. 앵커로 발탁된 이유가 ‘여성’이어서만은 아니었단 얘기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소개할 때 ‘여성’은 빠지지 않는 수식이다. 프랑스 통신사 AFP,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 같은 해외 언론들이 그를 주목했던 이유도 ‘여성 최초’였기 때문이다. 이런 타이틀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아요. 여전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40대 여성 첫 앵커라서 부담스럽다기보다 KBS 9시 뉴스라는 무게감이 부담스러운 거죠. 여성 앵커라는 걸 크게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 이렇게 한 번씩 상기시켜 줄 땐 내가 잘못했다간 여기자 전체, KBS 전체에 먹칠하겠구나, 긴장을 바짝 하게 되죠. 다른 처음들과 달리 이 ‘최초’는 전혀 설레지 않네요.”
‘앵커의 하루’ 역시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매일 출근해서 신문 기사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을 챙기고, 편집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 들어간다. 저녁 무렵이 되면 ‘변신’을 해야 하는데, 이게 제법 시간이 걸린다. “기계에 들어가 있으면 (헤어와 메이크업을) 뚝딱 해주면 좋겠다”고 상상만 한다. 오후 6시부터는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는 시간이다. 기자들이 써주는 ‘가원고’를 그대로 읽는 법은 없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고, 전후 맥락을 설명해주는 멘트도 따로 준비한다. 모르는 분야는 전문가들에게 전화 걸어 물어도 보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기자에게 직접 가서 묻기도 한다. “후배님, 이 문장은 무슨 뜻인가요?”
“선배면 그래도 좀 편한데, 후배 기자들에게 다가가기가 더 어렵죠. 그런데 이런 일도 있어요. 예를 들어 보험사기 관련한 제보가 들어와서 취재를 시작했다고 하면, 기자에게 후속 취재를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하죠. 그리고 뉴스를 전하면서 제보 달라는 멘트를 끝에 넣는 거예요. 그렇게 했더니 실제로 제보가 들어와서 후속 취재가 되고, 그럴 때는 재미있어요.”
BTS와의 만남 전 과정 유튜브로 생중계…“전날 잠도 안 자고 공부”
이렇게 종일 준비해서 뉴스를 해도 옷이 어떻다는 둥 머리 모양이 어떻다는 둥 뉴스 대신 외모를 품평하는 댓글들이 줄지어 달리곤 한다. 웃은 게 아닌데도 “웃지 말아라”, “심각하게 해라”라는 지적도 받았다. 입 모양을 내려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런 그가 마음 놓고 활짝 웃으며 뉴스를 진행한 날이 있다. 바로 BTS를 만났을 때였다. BTS는 지난 9월10일 KBS 9시 뉴스에 출연해 이 앵커와 약 20분간 인터뷰했다. KBS는 ‘한국 최초 빌보드 1위 BTS와 한국 최초 메인뉴스 여성앵커와의 만남’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어 홍보하고, BTS가 KBS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인터뷰 녹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전 과정을 유튜브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전 세계 팬들(아미)의 시선이 BTS와 이 앵커에게 집중된 순간이었다.
“천만 아미의 시선이 지켜보고 있던 거잖아요.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전 세계 아미들에게 전달되는 거니까 긴장이 됐죠. 한편으론 KBS 뉴스가 아미의 주 연령층인 젊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약하니까, 뭔가 어필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그래서 전날 잠도 안 자고 공부했어요. 우리 AD가 아미라서 앨범별 메시지부터 특징까지 뽑아서 자료를 만들어줬어요.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나 봐요. AD들이 피드백을 찾아줬는데 ‘엄마 미소를 보아라’, ‘앵커님 공부하셨네’ 이런 반응들이 있었데요. ‘수신료 낼 만하다’고요. 아- 욕은 안 먹겠구나, 안심했죠. (웃음)”
그보다 먼저 이 앵커가 ‘유명세’를 얻은 일도 있었다.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과 관련해 피해 여성에 대한 2차 가해가 범람하던 때, 이 앵커가 뉴스에서 인용한 문장 때문이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의 소설 문장을 인용한 멘트에 공영방송 앵커가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심지어 청와대에 이 앵커의 하차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반면 이 앵커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목소리도 그만큼 커졌다.
“친구들한테 연락이 왔어요. 나름 위로랍시고 ‘너 되게 유명한가 봐’, ‘너희 뉴스 보나 봐, 사람들이’ 하더군요. 그건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게 아니었어요.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2차 가해가 없어야 한다는 얘기였는데. 정말 다양한 목소리가 있고 오해할 소지도 많구나, 더 조심해야겠다 생각한 계기가 됐죠.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공영방송이라서, 수신료를 받는 (사실상) 유일한 언론사여서, KBS는 종종 가차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때로는 양극단에서 상반된 이유로 KBS 뉴스의 편향성을 질타하기도 한다. 얼마 전 KBS가 유튜브 뉴스 채널 구독자 100만명 돌파를 맞아 온라인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9%의 응답자가 KBS 뉴스의 가장 아쉬운 점으로 ‘공정성’을 꼽았다는 데서도 KBS가 직면한 문제와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100% 공정한 건 없겠지만, 최대한 편 들지 않고, 편 가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론의 기본은 불편부당이라고 배웠잖아요. 요즘은 성향을 드러내는 게 자연스러워졌지만, KBS만큼은 그래선 안 되죠. 물론 그렇게 못 해서 혼날 때도 있고 실수를 인정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미디어 홍수 시대에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공감대만큼은 보도국 전체에 있다고 생각하고, 매일 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편견 없이, KBS의 작은 변화들 지켜봐 주길…KBS는 ‘우리 꺼’니까”
“작은 목소리도 귀하게 듣겠습니다.” 1년 전 첫 뉴스에서 이 앵커는 이렇게 약속했다. 빈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1년간 KBS는 일하다 죽는 노동자, 비혼모와 출산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뉴스에 담아내 왔다. 지난 16일 ‘자발적 비혼모’를 선택한 사유리씨 인터뷰는 KBS 유튜브 뉴스 채널에서 역대 17번째로 높은, 245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비혼 출산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의제로 떠올랐다. 완벽하거나 충분치 않을지언정, KBS 뉴스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단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작가들이 그래요. 자기들도 KBS 뉴스는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들어와서 여러 시도를 하는 걸 보니 놀랍다고요. 특히 젊은 시청자들은 선입견 때문에 미리 피하기도 하고, 양극단에서 욕부터 하고 보는 일도 있는데요, 일단 KBS가 ‘우리 꺼’, ‘우리 방송’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저는 앵커 멘트 할 때도 ‘저희 KBS’라고 잘 안 해요. 어차피 ‘우리 꺼’니까요. 우리 이거 오늘 같이 봐요, 라고 얘기하는 식이죠. 앵커로서 저의 철칙이 절대 가르치려 하지 말자는 거예요. 눈높이에 맞추고 같이 얘기하는 뉴스로 변화를 많이 시도하고 있습니다.”
처음 앵커가 됐을 때, 후배 여기자가 그에게 해준 말이 있다. 지치지 말고 즐겁게 해달라고. 힘이 빠질 때면 그 말을 떠올린다는 그는 후배들에게도 같은 말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단독이나 좋은 기사가 나간 날이면 뉴스가 끝나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가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건 그런 마음에서다. 기사 좋았다고 같이 수다 떨고 웃다 보면 기자들도 힘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배들도 칭찬받을 일이 좀처럼 없잖아요. 동료들끼리 으쌰으쌰 하며 즐겁게, 재미를 느끼며 일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계를 두지 않으면 좋겠어요. 나는 여자야, 나는 스펙이 이거밖에 안 돼, 주요 부서에 못 갔어, 이렇게 한계를 두면 스스로 위축되는 것 같아요. 그냥 다 덤벼보면 좋겠어요. 기자 생활 길거든요. 요즘 코로나19 때문에도 그렇고 여러 안팎의 문제로 지친 후배, 동료들이 많은데 긍정적으로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KBS라는 조직의 저력을 믿거든요.”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